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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망유린
조회 75회 작성일 26-04-0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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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구속 뒤 석방된 다음날인 1978년 9월17일 원풍 노조 추석 잔치에서 필자(마이크 든 이)가 인사하고 있다. 오른쪽은 방용석 당시 지부장. 장남수 제공
요즘 교정시설에는 티브이도 있고 난방도 된다고 들었다. 예전에 비하면 호텔이네, 싶다. 감방 풍경을 담은 드라마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와 감방 정말 좋아졌네!” 뱉다가 민망해 픽 웃기도 한다.
좋아져 봐야 감방이지.
1978년 3월26일 새벽, 여의도광장에서는 한국 개신교 연합 부활절 예배 바다이야기예시 가 거행되고 있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23만㎡로 서울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 있던 시절이다. 당시 주최 측 추산 50만여 명 참석에 기독교 방송, 극동방송 등에서 실황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오전 4시경, 동트려면 아직 먼 새벽이 고개 숙인 군중들의 머리 위에 차갑고 어둡게 덮여 있었다. 단상 위에서는 서○○ 목사의 기도가 이어지던 중이었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다. 하늘에 고하는 목소리만 낭랑히 퍼지는 적요한 순간, 갑자기 후다닥 단상으로 뛰어든 무리가 있었으니 엄숙하게 기도 중이던 성직자는 얼마나 놀랐을까? (죄송했습니다, 목사님)
고양이처럼 튀어 올라 단상에 주르륵 서 있는 마이크를 닥치는 대로 움켜쥔 여섯 명의 여성 노동자는 동일방직, 삼원섬유, 방림방적, 남영나일론 둘, 그리고 원풍모방의 알라딘릴게임 나였다. 전파를 타고 온 세상으로 퍼지길 간절히 바라며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노동삼권 보장하라.”
“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JOC)는 빨갱이가 아니다.”
“방림방적 체불임금 해결하라.”
각자 미리 정한 구호를 손오공게임 세 번이나 외쳤을까? 우람한 남자의 손아귀에 머리채가 잡혔다. 서너 명이 달려들어 사지를 잡아당기며 질질 끌고 갔다. “이 XX들 다 죽여버려” 불시에 허를 찔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복형사들은 우리를 시멘트에 패대기쳐 갈아버리고 싶은 듯했다. 그렇게 끌려간 경찰서 유치장에서 단 1분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이틀 밤을 취조당했다.
사건 릴게임5만 이 일어난 전날 저녁 광화문의 구세군교회에서는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공단 노동자들에게 소중한 공간이었던 산업선교회나 가톨릭노동청년회를 빨갱이 집단이라 매도하고 단체행동권도 묶어 꿈틀만 하면 위법이라 처벌하는 사례가 수두룩했다. 임금을 주지 않은 채 항변하는 노동자를 박해한 방림방적 사례도 발표되었다. 이어 동일방직의 노동자가 단상에 올라 평화로운 노조 사무실에 느닷없이 남자들이 정화조의 오물을 양동이로 퍼와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들이붓고 뿌려댄 사건을 증언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언론에서는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예배를 마친 뒷자리에서 분노의 불이 지펴졌다.
“내일 새벽 여의도광장의 부활절 연합 예배에 가자. 언론이 한 줄도 보도하지 않는데 우리라도 소리치는 돌이 되자.”
우리가 주목한 건 생방송이었다.
나는 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 운동을 한 원풍모방 노조원이 되기 전 ‘월간 대화’로 노동문제를 미리 접할 수 있었고 심장에 격동을 느끼며 원풍모방에 입사했다. 더구나 내가 입소한 기숙사 방의 노조 간부 언니는 천지 사방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산업선교회, 민주인사들의 재판, 시국 강연회와 집회…. 그러다 보니 입사 일 년 만에 만장일치로 부서의 노조 대의원에 뽑혔다. 파릇한 정신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눈뜬 정의감은 구세군 집회 후의 모의를 회피할 수 없게 했다. 즐겨 부르던 노래처럼 ‘불을 찾아 뛰어든 불나방’이 된 것이다.
생방송으로 외친 호소는 전파를 타고 외마디 비명과 윙윙거리는 짧은 소음으로 흘러갔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검찰청으로 송치된 후에도 조사가 늦게 끝나 우리를 태운 호송버스는 한밤중에 영등포구치소에 도착했다. 번호 옆에 ‘부’가 새겨진 수의를 주었는데 부활절의 ‘부’자가 공범표식이 된 거였다. 두 개의 사동 중 한 동에 다섯 명을 들여보내고 나만 다른 동에 있는 소년수 방에 배치했다. 교도관들 눈에 내가 가장 어려 보인 모양이다. 배치된 방에는 소년수 외에 교도관을 도와 잔일을 하는 소지 두 명도 있었다. 교도관이 문을 따 나를 밀어 넣자, 자다 깬 소지가 틈을 만들어 주었다. 열악한 경찰서 유치장에서 시달린 터라 몸 하나 틀기도 어려운 사이에 끼어 내 집에라도 온 듯이 달게 잤다. “기상!” 소리에 눈을 뜨니 어린 소녀들 7∼8명이 말똥말똥 나를 바라보았다.
거의 절도와 소매치기였다. 긴 생머리에 눈이 동그란 아이가 매일 내 옆에 딱 붙어 앉았다. 가끔 궁금하다. 영치금도 면회도 없던 그 아이는 내가 좋았던 걸까? 노조와 인권단체를 통해 나에게 들어오는 사식이며 빵이 좋았던 걸까?
그때의 구치소에는 필기도구가 차입되지 않았다. 기상 후 줄지어 세면장 가서 물 한 바가지로 세수하고 밥 먹고 점호하다 저녁 9시 소등이 되지 않은 채 자야 했다.
그 단조로운 시간에 펜을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아쉽다. 사람들, 일상, 그 안에서 읽은 책, 생각도 많고 사연도 많았는데.
교도관이 지켜보는 자리에 앉아 봉함엽서에 편지를 쓰는 게 유일한 글쓰기였으나 그마저도 제한적이었다.
어느 날 한글을 모르는 ‘절도죄’ 명의 소녀가 들어왔다. 교도관이 나에게 손바닥만 한 흑판을 주며 그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라고 했다. 가르쳐 본 적이 있어야지, 이름을 써보게 하고 가나다라를 쓰게 했는데 그건 참 어설프고 재미없는 교습이었다. 교사가 신통찮아서인지 학생은 별 재미를 못 느끼는 것 같았는데 나는 글씨를 쓸 수 있어 기뻤다. 얼마 후 그 애가 소년원으로 가게 되면서 그마저 회수당했다.
책도 ‘불온’의 검열을 통과해야만 받을 수 있었다. 이념서적 같은 건 줘본들 읽을 수나 있었겠느냐만, 하여튼 그랬다. 그때 누군가 넣어준 책 중에 신동엽의 시집이 있었다. 덕분에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외우며 ‘아침저녁 마음 속 구름을 닦’았다.
1978년 3월 부활절 사건 당시 검사가 작성한 공소장. 장남수 제공
재판 때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홍성우, 이돈명 변호사 등이 열정적으로 변론해 주었다. 교회의 도움도 컸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차원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고 국제 인권단체도 힘을 보태주었다. 요즘 일부 종교단체가 세력 확장을 위한 정치적 행위로 크게 문제 되고 있지만 1970∼80년대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교회와 종교 지도자들이 많았다. 그 일부를 인용한다.
근로자 부활절 예배 시위 사건에 대한 성명서
“우리가 침묵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지난 3월26일 부활절 새벽에 노동자들이 기도하는 제단에 올라가 그들의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호소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어 있는 6명의 근로자들에 관하여(…) 이 노동자들이 외친 내용은 오늘의 교회가 그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채 “돌들이 소리치는” 현상이 아닌가? 부끄러움과 참회적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언론이 너무나 무거운 침묵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 마이크를 잡고 싶은 민중의 갈망이 아니겠는가?” -이하 중략-
1978년 4월7일 동일방직 사건 긴급대책위원회
1978년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복직투쟁 모습. 장남수 제공
감방에서 6개월을 보낸 후 항소심 재판에서 우리는 모두 석방되었다. 여섯 명 중 원풍모방노동조합원이던 나만 “조합원의 해고는 노사 합의 없이 할 수 없다.” 못 박아 둔 단체협약 조항 덕에 원직 복직되었다.
당사자로서 민망하나 부활절 여성 노동자들 시위 사건은 “70년대, 사업장이 다른 개별 여성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으로 기록되고,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에도 한 대목 등장하는 등 의미 부여가 되고 있다.
말해야 할 것들이 침묵해 돌들이 일어나야 했던 시대를 살아왔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장남수
요즘 교정시설에는 티브이도 있고 난방도 된다고 들었다. 예전에 비하면 호텔이네, 싶다. 감방 풍경을 담은 드라마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와 감방 정말 좋아졌네!” 뱉다가 민망해 픽 웃기도 한다.
좋아져 봐야 감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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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시경, 동트려면 아직 먼 새벽이 고개 숙인 군중들의 머리 위에 차갑고 어둡게 덮여 있었다. 단상 위에서는 서○○ 목사의 기도가 이어지던 중이었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다. 하늘에 고하는 목소리만 낭랑히 퍼지는 적요한 순간, 갑자기 후다닥 단상으로 뛰어든 무리가 있었으니 엄숙하게 기도 중이던 성직자는 얼마나 놀랐을까? (죄송했습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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