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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망유린
조회 25회 작성일 26-02-19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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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사아다쿨
▲ 토지몰수자 명단
ⓒ National Archives and Rec
"김진영 동무와 김복록 동무의 땅, 각각 800평, 200평 황금성릴게임 을 몰수합니다."
충북 청주시 수동 2구 인민위원장의 청천벽력 같은 선포였다.
"위원장 동무, 제가 자작하는 논까지 몰수하는 것은 억울합니다."
김진영의 항변이었다. 그의 항변엔 이유가 있었다. 그는 6.25 당시 밭 1500평(4950㎡)과 논 1023평(3375㎡)을 경작하고 있었 바다신2게임 는데, 그중 소작을 준 밭 200평과 자신이 경작하는 밭 100평을 몰수당한 것이다.
김복록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는 논 1111평(3666㎡)을 경작하고 있었는데, 그중 623평을 고지로 주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논 200평을 몰수당했다. 꼬지라고도 불리는 '고지'는 땅 없는 농민들에게 춘궁기에 선품삯을 주고 경작하는 땅을 말한다 오션릴게임 .
북한에서는 1946년 토지개혁을 하면서 5정보(약 1만 5000평, 4만 9500㎡) 이상의 땅을 무상몰수했다. 자세한 내막은 확인되지 않지만, 그 기준에 비하면 수동 2구의 김진영과 김복록의 사례는 이해가 되지 않는 조치였다.
위와 같은 황당한 사례가 있기는 했지만,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은 대다수 농민에게 바다이야기합법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또한 인공(인민공화국)시절 대한민국의 땅 없는 농민들도 토지개혁을 반겼다.
실패한 토지개혁
충청북도 토지개혁 실행위원회 위원장 김용암은 1950년 8월 15일 '분배받은 농가 단위로 통계표를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청주시 인민위원회 서기장 김우규는 8월 10일 토지개혁 공작원 회의를 소집했다. 토지개혁과 관련한 세부 실행 방침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는 남한에서의 토지개혁과 관련한 전체적 방침을 하달하고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
토지개혁에 이은 2단계 정책은 양곡 배급이었다. 그런데 양곡을 배급하기 위해서는 양곡의 재고가 얼마나 있는지를 조사해야 했다. 청주시 인민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백미 12만 9840kg, 베 62만 5806kg, 대맥(보리) 5만 7638kg, 소맥(밀) 360kg, 수수 1092kg, 콩 295kg 등이었다. 이를 토대로 식량 배급 대상자를 조사한 결과, 1950년 8월 31일 기준 대상자는 다음과 같았다.
노동자 1035명(1만 8630kg), 사무원 1240명(1만 8600kg), 각 학교 881명(5286kg), 내무원 296명(6216kg), 동 가족 수 5312명(4만 7808kg)으로, 총 인원 8768명의 1개월 배급량은 9만 6540kg이었다.
식량 배급은 무상이 아니었다. 청주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상주가 서기장에게 8월 28일 보낸 지시서에 의하면 "직장 책임자들은 식량을 배급받은 이들에게 대금을 9월 3일까지 징수할 것"을 통지했다.
1950년 가을 수확을 앞두고는 농작물 수확량 판정위원회를 구성했다. 판정위원회는 특히 한해(旱害, 가뭄 피해)와 폭격으로 인한 피해 조사에 집중했다. 판정위원은 대부분 농민들이 맡았다. 청주시 우암동 2구에서는 9월 8일 리수덕이 위원장으로, 곽동훈이 서기로, 김문성 외 4명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완전히 독자적인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당, 인민위원회, 검찰소, 재판소 대표들이 이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3기 작물 판정은 9월 13일까지, 4기 작물 판정은 9월 20일까지 진행하도록 했다. 판정에 따른 현물세 완납은 3기 작물은 10월 10일까지, 4기 작물은 11월 20일까지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공시절 토지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짧은 기간의 정책은 성공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76일에 불과했던 인공시절 동안 토지개혁을 완수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현물세 납부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수확물 판정 과정에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조사를 한다는 명분하에 곡식 낱알을 세는 판정위원들의 모습을 본 농민들의 마음이 인민위원회로부터 떠난 것이 토지개혁 실패의 결정적 이유였다.
몰수 vs. 인수증
"충북도청 사택 9개 동 350평(1155㎡)을 몰수해 내무부 사택으로 사용한다.""문화동 유치원 기와집 2층 1개 동 100평(330㎡)을 군사상 필요로 몰수한다."
충청북도 내무부(경찰국)와 청주내무서(경찰서) 결정사항이었다. 문화동 유치원은 몰수해 보안대대부에서 사용할 예정이었다.
충청북도 경찰국과 청주내무서는 6·25전쟁 전 국가기구와 지방관청, 반역자의 부동산을 몰수해 관공서 청사 및 숙소, 그리고 군사상 필요에 따라 보안대대부의 공간으로 사용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동의 영단주택(200평), 도청 사택(100평), 미국인 주택(150평)은 내무부 청사와 숙소로 사용했다. 영동의 옛 전매국(150평), 수동의 도청 관사(40평), 경찰 주택(20평), 남문로 1가의 옛 경찰학교(300평)는 내무부 호안부 및 통신부 청사와 관사로 사용되었다.
수동의 교동인민학교(150평), 식산은행 사택(40평), 문화동의 남조선석탄주식회사 건물, 도청 농림부장 사택, 청주시장 사택, 경찰관 사택, 유치원 및 유치원 관사, 형무관 사택도 군사상 필요로 몰수했다. 수동의 국방군(국군) 사택, 식산은행 사택, 상과대학 역시 군사상 목적으로 몰수돼 보안대대부에서 사용하기로 했다.
청주내무서장(청주경찰서장) 리정련이 1950년 8월 18일 청주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앞으로 보낸 문서에 의하면, 적 역산(逆産) 과수원을 접수해 청주시에 인계한다고 되어 있다. 즉 "장기철이 관리하는 과수원을 국군 장교인 장남 장석이 부재중이므로 몰수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직동 홍재철의 과수원 800평과 복숭아 5관(18.75kg), 포도 50본(그루), 금천동 홍성삼의 과수원 1,000평, 문화동 장기철의 과수원 425평과 포도 50본, 복숭아 5본, 포도 50관(187kg), 문화동 한석규의 과수원 196평과 포도 30본 역시 적산이라는 이유로 몰수되었다.
관공서와 미국인 주택, 지주 및 부농의 과수원을 무상몰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민군은 재산의 사적 소유를 일체 부정했던가? 그렇지는 않다. 일반 시민들의 재산은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어 군사상 목적으로 일시 사용하거나 전용할 경우 인수증을 써주었다. 그럴 경우 인민군이나 내무서는 인민위원회에 적절한 사용료 및 보상금을 지급할 것을 요청했다.
청주시 민주여성동맹 위원장 권영순은 성명 미상으로부터 광목 1필을 인수했다는 인수증을 1950년 8월 22일자로 발급했다. 조선인민군 제238부대장 유춘식은 "238부대의 물품을 청주에서 가덕면까지 한용제의 소구루마를 이용해 운반했기에"라는 내용의 기명서(記名書)를 작성해 주었다.
해방지구 경비사령관이 청주시 인민위원회 보급과에 보낸 문서에 의하면 '시민들이 소채(채소)와 도야지(돼지)를 해방지구 경비사령부(사령관 진원식)에 공급하였으나 영수증도 내지(발급) 하지 않고 대금도 지불치 않고서 부대는 이동하였으니 (청주)시 임시 인민위원회에서 청산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경비사령부가 청주시민들에게 공급받은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전용준으로부터 7월 22일 호박 90관, 열무 117관, 파 57관을 공급받았고, 7월 23일부터 25일까지 호박과 열무, 파를 공급받았다. 유창수와 남대원으로부터는 7월 24일과 25일에 각각 돼지 30관과 35관을 공급받았다. 다만 청주시 인민위원회가 농민들에게 채소와 돼지 값을 지급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청주시 관공서 서류, 1950).
전시 총동원체제
충청북도 인민위원회는 도내 각 시·군 인민위원회에 재판소 참심원(參審員)을 9월 7일까지 선출하라고 지시했다. 참심원은 충북 인민재판소에서 판사와 함께 재판 합의체를 구성하는 인물이다. 청주시는 남자 15명, 여자 5명, 총 20명의 후보자를 선출했다.
그러나 참심원으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인민위원회가 제시한 자격 기준을 갖춰야 했다. 충청북도 인민위원회가 제시한 참심원 자격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 참심원 인민재판에 참관한 참심원 자격
ⓒ National Archives and Rec
- 상기 인원은 년령 25세 내지 45세의 남녀로, 국문을 원활히 읽고 쓰는 자로서 공화국 시책을 적극 지지하며 정치적으로 무장한 자.
- 친일 친미 분자 및 민족반역자와 1945년 8월 15일 전 일제 기관 8.15후 리승만 괴뢰 정부 기관에 복무한 자는 제외한다.
- 민주운동의 푸락치 공작을 한 자라 할지라도 보련(국민보도연맹) 관계 반동 단체 가입 및 적 기관에 복무한 자는 이를 제외한다.
청주시 인민위원회는 청주시에 할당된 참심원을 선출하기 위해 각 동 인민위원회에 참심원 후보자를 9월 3일까지 추천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서운동 인민위원회는 송진흔(1918년생, 서운동 인민위원장), 김용준(1924년생, 무직), 조종부(1914년생, 충북도당 경리부)를 추천했다. 충청북도 인민위원회에서 선출한 참심원이 인민재판에 참여해 얼마나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거센 파도처럼 남쪽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런데 인민군의 점령은 낙동강 이북까지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 인민군에게는 병력과 전쟁물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의용군이다. 전쟁 초기 서울·경기 지역에서는 일부 학생과 청년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지만, 청주에서 의용군이 모집될 당시에는 자발성보다는 강제성이 훨씬 농후했다.
다만 자의든 타의든 의용군에 동원되었다고 해서 모두 전선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최근 필자가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소위 심사를 통해 합격한 자만이 의용군에 갔다. 청주시 군사동원부 용담동 의용군 심사소에서 심사한 항목은 이름, 나이, 직업, 소속 정당 및 단체 순이다.
▲ 귀가된 의용군 명단
ⓒ National Archives and Rec
우유권(37세, 노동, 대한청년단), 이한종(24세, 노동, 대한청년단), 김원배(20세, 노동, 대한청년단), 한동근(18세, 학생, 무), 전영국(29세, 노동, 남로당), 서선봉(30세, 노동, 무) 등이 심사를 받았다. 이들이 모두 전선에 투입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심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귀가한 이들도 있었다. 청주시 남문로 1가 2구 인민위원회는 신병구, 증경모, 최순만, 리순배가 심사에서 불합격해 귀가 조치되었다고 8월 22일자 서류에 적시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모든 이가 심사를 거친 것은 아니다.
무심철교, 서문다리, 남다리가 폭격돼
미군이 참전하면서 전투기를 이용한 폭격은 전쟁 양상을 크게 바꾸었다. 청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철교와 다리, 관공서와 민가에 대한 폭격이 이어졌다.
청주시 인민위원회의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도로 파괴(4개소), 하수도(35호), 철교(무심천), 서문다리, 남다리(현 청남교), 금천교, 사천교, 사직동 논, 탑동 밭 등이 미군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인민위원회는 전쟁 피해 복구 사업을 벌였고, 부상자들은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러한 와중에도 청주시 인민위원회는 9월 22일 석교인민학교(현 석교초등학교) 강당에서 '조·쏘 친선은 조국 통일의 담보로 된다'는 주제로 정치 강연회를 열었다.
▲ 정치강연회 정치강연회
ⓒ National Archives and Rec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사아다쿨
▲ 토지몰수자 명단
ⓒ National Archives and Rec
"김진영 동무와 김복록 동무의 땅, 각각 800평, 200평 황금성릴게임 을 몰수합니다."
충북 청주시 수동 2구 인민위원장의 청천벽력 같은 선포였다.
"위원장 동무, 제가 자작하는 논까지 몰수하는 것은 억울합니다."
김진영의 항변이었다. 그의 항변엔 이유가 있었다. 그는 6.25 당시 밭 1500평(4950㎡)과 논 1023평(3375㎡)을 경작하고 있었 바다신2게임 는데, 그중 소작을 준 밭 200평과 자신이 경작하는 밭 100평을 몰수당한 것이다.
김복록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는 논 1111평(3666㎡)을 경작하고 있었는데, 그중 623평을 고지로 주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논 200평을 몰수당했다. 꼬지라고도 불리는 '고지'는 땅 없는 농민들에게 춘궁기에 선품삯을 주고 경작하는 땅을 말한다 오션릴게임 .
북한에서는 1946년 토지개혁을 하면서 5정보(약 1만 5000평, 4만 9500㎡) 이상의 땅을 무상몰수했다. 자세한 내막은 확인되지 않지만, 그 기준에 비하면 수동 2구의 김진영과 김복록의 사례는 이해가 되지 않는 조치였다.
위와 같은 황당한 사례가 있기는 했지만,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은 대다수 농민에게 바다이야기합법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또한 인공(인민공화국)시절 대한민국의 땅 없는 농민들도 토지개혁을 반겼다.
실패한 토지개혁
충청북도 토지개혁 실행위원회 위원장 김용암은 1950년 8월 15일 '분배받은 농가 단위로 통계표를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청주시 인민위원회 서기장 김우규는 8월 10일 토지개혁 공작원 회의를 소집했다. 토지개혁과 관련한 세부 실행 방침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는 남한에서의 토지개혁과 관련한 전체적 방침을 하달하고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
토지개혁에 이은 2단계 정책은 양곡 배급이었다. 그런데 양곡을 배급하기 위해서는 양곡의 재고가 얼마나 있는지를 조사해야 했다. 청주시 인민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백미 12만 9840kg, 베 62만 5806kg, 대맥(보리) 5만 7638kg, 소맥(밀) 360kg, 수수 1092kg, 콩 295kg 등이었다. 이를 토대로 식량 배급 대상자를 조사한 결과, 1950년 8월 31일 기준 대상자는 다음과 같았다.
노동자 1035명(1만 8630kg), 사무원 1240명(1만 8600kg), 각 학교 881명(5286kg), 내무원 296명(6216kg), 동 가족 수 5312명(4만 7808kg)으로, 총 인원 8768명의 1개월 배급량은 9만 6540kg이었다.
식량 배급은 무상이 아니었다. 청주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상주가 서기장에게 8월 28일 보낸 지시서에 의하면 "직장 책임자들은 식량을 배급받은 이들에게 대금을 9월 3일까지 징수할 것"을 통지했다.
1950년 가을 수확을 앞두고는 농작물 수확량 판정위원회를 구성했다. 판정위원회는 특히 한해(旱害, 가뭄 피해)와 폭격으로 인한 피해 조사에 집중했다. 판정위원은 대부분 농민들이 맡았다. 청주시 우암동 2구에서는 9월 8일 리수덕이 위원장으로, 곽동훈이 서기로, 김문성 외 4명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완전히 독자적인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당, 인민위원회, 검찰소, 재판소 대표들이 이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3기 작물 판정은 9월 13일까지, 4기 작물 판정은 9월 20일까지 진행하도록 했다. 판정에 따른 현물세 완납은 3기 작물은 10월 10일까지, 4기 작물은 11월 20일까지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인공시절 토지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짧은 기간의 정책은 성공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76일에 불과했던 인공시절 동안 토지개혁을 완수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현물세 납부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수확물 판정 과정에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조사를 한다는 명분하에 곡식 낱알을 세는 판정위원들의 모습을 본 농민들의 마음이 인민위원회로부터 떠난 것이 토지개혁 실패의 결정적 이유였다.
몰수 vs. 인수증
"충북도청 사택 9개 동 350평(1155㎡)을 몰수해 내무부 사택으로 사용한다.""문화동 유치원 기와집 2층 1개 동 100평(330㎡)을 군사상 필요로 몰수한다."
충청북도 내무부(경찰국)와 청주내무서(경찰서) 결정사항이었다. 문화동 유치원은 몰수해 보안대대부에서 사용할 예정이었다.
충청북도 경찰국과 청주내무서는 6·25전쟁 전 국가기구와 지방관청, 반역자의 부동산을 몰수해 관공서 청사 및 숙소, 그리고 군사상 필요에 따라 보안대대부의 공간으로 사용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동의 영단주택(200평), 도청 사택(100평), 미국인 주택(150평)은 내무부 청사와 숙소로 사용했다. 영동의 옛 전매국(150평), 수동의 도청 관사(40평), 경찰 주택(20평), 남문로 1가의 옛 경찰학교(300평)는 내무부 호안부 및 통신부 청사와 관사로 사용되었다.
수동의 교동인민학교(150평), 식산은행 사택(40평), 문화동의 남조선석탄주식회사 건물, 도청 농림부장 사택, 청주시장 사택, 경찰관 사택, 유치원 및 유치원 관사, 형무관 사택도 군사상 필요로 몰수했다. 수동의 국방군(국군) 사택, 식산은행 사택, 상과대학 역시 군사상 목적으로 몰수돼 보안대대부에서 사용하기로 했다.
청주내무서장(청주경찰서장) 리정련이 1950년 8월 18일 청주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앞으로 보낸 문서에 의하면, 적 역산(逆産) 과수원을 접수해 청주시에 인계한다고 되어 있다. 즉 "장기철이 관리하는 과수원을 국군 장교인 장남 장석이 부재중이므로 몰수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직동 홍재철의 과수원 800평과 복숭아 5관(18.75kg), 포도 50본(그루), 금천동 홍성삼의 과수원 1,000평, 문화동 장기철의 과수원 425평과 포도 50본, 복숭아 5본, 포도 50관(187kg), 문화동 한석규의 과수원 196평과 포도 30본 역시 적산이라는 이유로 몰수되었다.
관공서와 미국인 주택, 지주 및 부농의 과수원을 무상몰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민군은 재산의 사적 소유를 일체 부정했던가? 그렇지는 않다. 일반 시민들의 재산은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어 군사상 목적으로 일시 사용하거나 전용할 경우 인수증을 써주었다. 그럴 경우 인민군이나 내무서는 인민위원회에 적절한 사용료 및 보상금을 지급할 것을 요청했다.
청주시 민주여성동맹 위원장 권영순은 성명 미상으로부터 광목 1필을 인수했다는 인수증을 1950년 8월 22일자로 발급했다. 조선인민군 제238부대장 유춘식은 "238부대의 물품을 청주에서 가덕면까지 한용제의 소구루마를 이용해 운반했기에"라는 내용의 기명서(記名書)를 작성해 주었다.
해방지구 경비사령관이 청주시 인민위원회 보급과에 보낸 문서에 의하면 '시민들이 소채(채소)와 도야지(돼지)를 해방지구 경비사령부(사령관 진원식)에 공급하였으나 영수증도 내지(발급) 하지 않고 대금도 지불치 않고서 부대는 이동하였으니 (청주)시 임시 인민위원회에서 청산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경비사령부가 청주시민들에게 공급받은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전용준으로부터 7월 22일 호박 90관, 열무 117관, 파 57관을 공급받았고, 7월 23일부터 25일까지 호박과 열무, 파를 공급받았다. 유창수와 남대원으로부터는 7월 24일과 25일에 각각 돼지 30관과 35관을 공급받았다. 다만 청주시 인민위원회가 농민들에게 채소와 돼지 값을 지급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청주시 관공서 서류, 1950).
전시 총동원체제
충청북도 인민위원회는 도내 각 시·군 인민위원회에 재판소 참심원(參審員)을 9월 7일까지 선출하라고 지시했다. 참심원은 충북 인민재판소에서 판사와 함께 재판 합의체를 구성하는 인물이다. 청주시는 남자 15명, 여자 5명, 총 20명의 후보자를 선출했다.
그러나 참심원으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인민위원회가 제시한 자격 기준을 갖춰야 했다. 충청북도 인민위원회가 제시한 참심원 자격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 참심원 인민재판에 참관한 참심원 자격
ⓒ National Archives and Rec
- 상기 인원은 년령 25세 내지 45세의 남녀로, 국문을 원활히 읽고 쓰는 자로서 공화국 시책을 적극 지지하며 정치적으로 무장한 자.
- 친일 친미 분자 및 민족반역자와 1945년 8월 15일 전 일제 기관 8.15후 리승만 괴뢰 정부 기관에 복무한 자는 제외한다.
- 민주운동의 푸락치 공작을 한 자라 할지라도 보련(국민보도연맹) 관계 반동 단체 가입 및 적 기관에 복무한 자는 이를 제외한다.
청주시 인민위원회는 청주시에 할당된 참심원을 선출하기 위해 각 동 인민위원회에 참심원 후보자를 9월 3일까지 추천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서운동 인민위원회는 송진흔(1918년생, 서운동 인민위원장), 김용준(1924년생, 무직), 조종부(1914년생, 충북도당 경리부)를 추천했다. 충청북도 인민위원회에서 선출한 참심원이 인민재판에 참여해 얼마나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거센 파도처럼 남쪽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런데 인민군의 점령은 낙동강 이북까지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전진하지 못한 인민군에게는 병력과 전쟁물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의용군이다. 전쟁 초기 서울·경기 지역에서는 일부 학생과 청년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지만, 청주에서 의용군이 모집될 당시에는 자발성보다는 강제성이 훨씬 농후했다.
다만 자의든 타의든 의용군에 동원되었다고 해서 모두 전선에 투입된 것은 아니었다. 최근 필자가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소위 심사를 통해 합격한 자만이 의용군에 갔다. 청주시 군사동원부 용담동 의용군 심사소에서 심사한 항목은 이름, 나이, 직업, 소속 정당 및 단체 순이다.
▲ 귀가된 의용군 명단
ⓒ National Archives and Rec
우유권(37세, 노동, 대한청년단), 이한종(24세, 노동, 대한청년단), 김원배(20세, 노동, 대한청년단), 한동근(18세, 학생, 무), 전영국(29세, 노동, 남로당), 서선봉(30세, 노동, 무) 등이 심사를 받았다. 이들이 모두 전선에 투입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심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귀가한 이들도 있었다. 청주시 남문로 1가 2구 인민위원회는 신병구, 증경모, 최순만, 리순배가 심사에서 불합격해 귀가 조치되었다고 8월 22일자 서류에 적시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모든 이가 심사를 거친 것은 아니다.
무심철교, 서문다리, 남다리가 폭격돼
미군이 참전하면서 전투기를 이용한 폭격은 전쟁 양상을 크게 바꾸었다. 청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철교와 다리, 관공서와 민가에 대한 폭격이 이어졌다.
청주시 인민위원회의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도로 파괴(4개소), 하수도(35호), 철교(무심천), 서문다리, 남다리(현 청남교), 금천교, 사천교, 사직동 논, 탑동 밭 등이 미군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인민위원회는 전쟁 피해 복구 사업을 벌였고, 부상자들은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러한 와중에도 청주시 인민위원회는 9월 22일 석교인민학교(현 석교초등학교) 강당에서 '조·쏘 친선은 조국 통일의 담보로 된다'는 주제로 정치 강연회를 열었다.
▲ 정치강연회 정치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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