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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망유린
조회 17회 작성일 25-09-2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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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일본의 초대 총리를 살해,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2014년 1월 중국 하얼빈에 안중근 기념관이 건립됐을 당시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한 말이다.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의 대변인이기도 하다. 스가의 생각은 한국의 이른바 뉴라이트들과 비슷하다. 김구도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들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겼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본은 1909년 7월 6일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건'을 이미 의결하고 적절한 시기만 보고 있었다.
1909년 조선 주둔 일본 군대는 이른바 '남한대토벌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의병 소탕 작전KODEX레버리지 주식
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2년 전인 1907년 이미 강제 해산된 상태였다. 1902년부터는 일본의 일개 시중은행인 제일은행 발행권이 조선의 법정 화폐로 통용되고 있었다. 망국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해 10월경 백산은 남형우, 서상일, 김동삼, 신채호, 윤현진, 최완 등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릴게임판매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나중에 2대 단장이 된다. 80여 명의 단원은 대체로 신민회 계열의 영남 지역의 계몽적 지식인과 자산가, 지주, 혁신 유림 등이었다. 대동청년단 단원들은 조직적 활동보다는 각자의 분야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했다. 자산가들은 상회나 회사를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거나 교육 사업을 펼쳤다. 다른 이들은 임시정부나 의열단, 독립군에서 바다이야기 사이트
활동했다. 예를 들면 신채호는 독립운동가 겸 사학자, 남형우는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법무처장, 김동삼은 만주벌 호랑이로 불리던 무장 독립운동가, 윤현진은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 최완은 경주 최부자 집 출신으로 임시정부의 자금줄이었다.
백산 안희제 흉야마토사이트
상, 부산 백산기념관. /김석환
백산은 금테 안경에 일본 옷을 입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급 여관에 묵을 정도로 신분을 위장하며 살았다. 공개적이고 합법적 공간 위주로 활동을 하면서도 그랬다. 대동청년단은 백산의 유일한 비합법 비공개조직이었다.
백산은 나라가 망한 이듬해인 1911야마토
년 조선을 떠나 1914년 9월까지 러시아와 중국에 머문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쑨원(孫文)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되던 시기였다. 1914년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해이기도 했다. 백산은 안창호, 신채호 등과 의논한 결과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국내의 비밀연락망과 안정적인 자금조달이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귀국해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귀국이 1912년이고 백산상회 설립도 1914년 이전이라는 설도 있음)
백산은 이를 위해 고향의 농지 2000 두락을 팔았다. 전통 사회에서 1두락은 한 두락은 볍씨 한 말을 심을 정도의 넓이이다. 지방마다 다르지만, 논의 경우 약 150~300평 정도를 일컫는다.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GPT는 그 당시와 지금의 쌀값을 기준으로 하면 2000 두락의 매매대금은 현재 기준으로는 최대 수십억 원 정도라고 추정한다. 백산상회는 초기에는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개인 회사였으나 1918년에는 자본금 14만 원의 합자회사로 바뀐다.
백산상회 주요 투자자의 근거지였던 구포 부근 낙동강. /김석환
주요 투자자는 부산 구포 지역의 지주와 경주 최씨 집안이었다. 오미일의 논문 '일제 시기 부산지역 백산상회의 창립과 변천'에 따르면 합자회사 설립 당시 무한책임사원은 안희제, 윤현태, 최완 등 3명이었는데 윤현태의 동생 윤현진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초대 재무차장을 맡았고, 최완도 재무부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책임졌다는 뜻이다. 오미일에 따르면 당시가 호황기의 절정이었음에도 백산상회의 영업 실적은 아주 부진했다. 백산상회는 차입금과 지불어음 등 1919년 기준 55만 원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물가상승률을 기준으로 한 챗GPT 추계에 따르면 당시의 65만 원은 현재 가치로 최대 수백억 원대라고 한다.
역사가들은 이렇게 빼돌려진 돈이 상해 임시정부로 흘러갔을 것으로 본다. 백산상회는 1919년 주식회사 백산무역으로 재출범하지만, 일본 경찰의 노골적인 탄압 속에 누적 적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1928년 파산한다. 백산은 늘 바빴다. 1920년대 초 임시정부 비밀연락조직인 교통국의 국내 총괄조직이 부산 백산상회에 있었고, 백산 본인이 직접 연락책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그래서 합자회사 백산상회와 주식회사 백산무역 시절, 경영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최완의 형 최준이었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지만, 최준은 12대, 300년 동안 만석의 재산을 유지한 전설적인 경주 최부자 집 종손이었다. 최준은 백산무역을 유지하기 위해 문중 재산 대부분을 담보로 잡힐 정도였다. 겨우 남은 최씨 집안의 남은 땅과 선산, 고택은 현재는 영남대학교 재단인 영남학원이 갖고 있다. 영남대는 한때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 정신에 입각해 교육을 실시한다'를 대학 정관 제1조로 당당하게 넣었던 대학이다.
백산상회 옛 터에 지어진 백산기념관. /김석환
백산은 멀티 플레이어였다. 1926년부터는 뒷날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사회부 장관이 되는 전진한을 지원해 협동조합 운동을 벌이고 기관지로 '자력(自力)'을 발행한다. 협동조합은 경제적 약자인 소생산자나 소비자가 서로 협력,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목적으로 공동출자로 설립된 기업이다. 생산조합, 소비조합, 신용조합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조선 민중을 위한 새로운 경제적 대안의 실천이었다. 일제가 출판을 금지했던 '자력'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자력(自力)이다. 굶주려 비쩍 여윈 몰골로 손발을 묶이고 채찍을 맞으면서도 차마 죽을 수 없었던 조선의 자력이다. 내 발아래에는 오직 생사가 있을 뿐이다. 또 다시 나를 위협할 어떤 것도 없을 것이다."
안희제는 1929년 <동아일보>, <조선일보>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3대 신문이었던 <중외일보> 사장에 취임하지만, 기사와 관련해 잇따른 발행중단과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년여 만에 중외일보는 발행을 중단한다.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활동공간이 축소되자 백산은 1933년 중국 만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백산은 발해의 옛 수도 상경용천부가 있던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을 주목했다. 그는 대규모 토지를 매입하고, 송화강의 지류인 무단강(牡丹江) 상류 일부를 석축으로 막아 수로를 건설해 '발해농장'을 조성했다. 백산상회 지배인 출신으로 금광 개발에 성공한 김태원의 재정적 도움이 컸다. 발해농장은 만주를 거점으로 하는 새로운 국외 독립운동기지였다.
이주 농민과 2세들에게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는 민족정신과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를 위해 발해 보통학교가 설립되고 백산이 교장을 맡았다.
백산이 일구었던 발해농장의 현재 모습. /진재운 하성창
1934년에는 대종교 총본사를 발해농장 부근으로 옮기도록 했다. 1909년 나철이 '단군교(檀君敎)'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대종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1919년 2월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명 중 25명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조소앙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는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을 비롯해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유동열,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박용만,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안창호, 윤세복, 황상규 등 39인이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제헌의회)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의 주역인 서일, 김좌진, 이범석 등의 북로군정서도 대종교가 양성한 군사조직이었다. 대종교는 민족 정체성의 원천이었지만, 만주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참패로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일제는 더욱 예민해졌다. 1942년 10월에 발생한 조선어학회사건을 빌미로 편지를 날조해 대종교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였다고 하면서 대종교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대종교 3대 도사교(교단 최고 책임자) 윤세복과 안희제 등 모두 25명이 잡혀 들어가 고문을 받다가 열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른바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백산은 9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출옥 3시간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일제 강점기 대종교는 민족해방의 상징이었다. 윤동주 송몽규가 다닌 간도의 명동학교 설립자 김약연 목사는 교실에 단군 초상화를 걸었고, 예배당엔 십자가와 단군기를 나란히 걸었을 정도였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에서도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총리, 안호상 문교부 장관, 명제세 심계원장(예산처장), 정인보 감찰위원장(감사원장) 등이 대종교 교도였고, 신생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를 단군기원(檀紀)으로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위해 1953년 이후 이범석과 그 세력을 탄압하면서 대종교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제헌국회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무시하고 개신교의 하나님에게 감사기도를 드리자고 했던 이승만에게는 대종교는 일시적 이용의 대상일 뿐이었다. 독립군을 토벌했던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에게도 대종교는 불편한 존재였다. 대종교는 한국 사회에서 국수주의적 신화로 매도되었고, 독립운동의 제단에 가장 많은 피를 바쳤던 대종교는 그렇게 역사에서 지워져 갔다.
대종교의 성지인 강원도 태백산 천제단. /김석환
1945년 해방 당시 0.5%였던 개신교 신자 비율은 이제 20%에 이른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하느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발언하는 목사의 지휘 아래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고 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耶非耶)"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 필자는 KNN 사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고인돌과 인공지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콘텐츠와 한국 언론기업의 문제에서부터 산업혁명 이후 헤게모니를 둘러싼 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 생성형 인공지능, 플랫폼,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다.
2014년 1월 중국 하얼빈에 안중근 기념관이 건립됐을 당시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한 말이다.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의 대변인이기도 하다. 스가의 생각은 한국의 이른바 뉴라이트들과 비슷하다. 김구도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들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겼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본은 1909년 7월 6일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건'을 이미 의결하고 적절한 시기만 보고 있었다.
1909년 조선 주둔 일본 군대는 이른바 '남한대토벌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의병 소탕 작전KODEX레버리지 주식
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2년 전인 1907년 이미 강제 해산된 상태였다. 1902년부터는 일본의 일개 시중은행인 제일은행 발행권이 조선의 법정 화폐로 통용되고 있었다. 망국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해 10월경 백산은 남형우, 서상일, 김동삼, 신채호, 윤현진, 최완 등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릴게임판매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나중에 2대 단장이 된다. 80여 명의 단원은 대체로 신민회 계열의 영남 지역의 계몽적 지식인과 자산가, 지주, 혁신 유림 등이었다. 대동청년단 단원들은 조직적 활동보다는 각자의 분야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했다. 자산가들은 상회나 회사를 설립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거나 교육 사업을 펼쳤다. 다른 이들은 임시정부나 의열단, 독립군에서 바다이야기 사이트
활동했다. 예를 들면 신채호는 독립운동가 겸 사학자, 남형우는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법무처장, 김동삼은 만주벌 호랑이로 불리던 무장 독립운동가, 윤현진은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 최완은 경주 최부자 집 출신으로 임시정부의 자금줄이었다.
백산 안희제 흉야마토사이트
상, 부산 백산기념관. /김석환
백산은 금테 안경에 일본 옷을 입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급 여관에 묵을 정도로 신분을 위장하며 살았다. 공개적이고 합법적 공간 위주로 활동을 하면서도 그랬다. 대동청년단은 백산의 유일한 비합법 비공개조직이었다.
백산은 나라가 망한 이듬해인 1911야마토
년 조선을 떠나 1914년 9월까지 러시아와 중국에 머문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쑨원(孫文)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되던 시기였다. 1914년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해이기도 했다. 백산은 안창호, 신채호 등과 의논한 결과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국내의 비밀연락망과 안정적인 자금조달이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귀국해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귀국이 1912년이고 백산상회 설립도 1914년 이전이라는 설도 있음)
백산은 이를 위해 고향의 농지 2000 두락을 팔았다. 전통 사회에서 1두락은 한 두락은 볍씨 한 말을 심을 정도의 넓이이다. 지방마다 다르지만, 논의 경우 약 150~300평 정도를 일컫는다.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GPT는 그 당시와 지금의 쌀값을 기준으로 하면 2000 두락의 매매대금은 현재 기준으로는 최대 수십억 원 정도라고 추정한다. 백산상회는 초기에는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개인 회사였으나 1918년에는 자본금 14만 원의 합자회사로 바뀐다.
백산상회 주요 투자자의 근거지였던 구포 부근 낙동강. /김석환
주요 투자자는 부산 구포 지역의 지주와 경주 최씨 집안이었다. 오미일의 논문 '일제 시기 부산지역 백산상회의 창립과 변천'에 따르면 합자회사 설립 당시 무한책임사원은 안희제, 윤현태, 최완 등 3명이었는데 윤현태의 동생 윤현진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초대 재무차장을 맡았고, 최완도 재무부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책임졌다는 뜻이다. 오미일에 따르면 당시가 호황기의 절정이었음에도 백산상회의 영업 실적은 아주 부진했다. 백산상회는 차입금과 지불어음 등 1919년 기준 55만 원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물가상승률을 기준으로 한 챗GPT 추계에 따르면 당시의 65만 원은 현재 가치로 최대 수백억 원대라고 한다.
역사가들은 이렇게 빼돌려진 돈이 상해 임시정부로 흘러갔을 것으로 본다. 백산상회는 1919년 주식회사 백산무역으로 재출범하지만, 일본 경찰의 노골적인 탄압 속에 누적 적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1928년 파산한다. 백산은 늘 바빴다. 1920년대 초 임시정부 비밀연락조직인 교통국의 국내 총괄조직이 부산 백산상회에 있었고, 백산 본인이 직접 연락책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그래서 합자회사 백산상회와 주식회사 백산무역 시절, 경영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최완의 형 최준이었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지만, 최준은 12대, 300년 동안 만석의 재산을 유지한 전설적인 경주 최부자 집 종손이었다. 최준은 백산무역을 유지하기 위해 문중 재산 대부분을 담보로 잡힐 정도였다. 겨우 남은 최씨 집안의 남은 땅과 선산, 고택은 현재는 영남대학교 재단인 영남학원이 갖고 있다. 영남대는 한때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 정신에 입각해 교육을 실시한다'를 대학 정관 제1조로 당당하게 넣었던 대학이다.
백산상회 옛 터에 지어진 백산기념관. /김석환
백산은 멀티 플레이어였다. 1926년부터는 뒷날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사회부 장관이 되는 전진한을 지원해 협동조합 운동을 벌이고 기관지로 '자력(自力)'을 발행한다. 협동조합은 경제적 약자인 소생산자나 소비자가 서로 협력,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목적으로 공동출자로 설립된 기업이다. 생산조합, 소비조합, 신용조합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조선 민중을 위한 새로운 경제적 대안의 실천이었다. 일제가 출판을 금지했던 '자력'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자력(自力)이다. 굶주려 비쩍 여윈 몰골로 손발을 묶이고 채찍을 맞으면서도 차마 죽을 수 없었던 조선의 자력이다. 내 발아래에는 오직 생사가 있을 뿐이다. 또 다시 나를 위협할 어떤 것도 없을 것이다."
안희제는 1929년 <동아일보>, <조선일보>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3대 신문이었던 <중외일보> 사장에 취임하지만, 기사와 관련해 잇따른 발행중단과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년여 만에 중외일보는 발행을 중단한다.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활동공간이 축소되자 백산은 1933년 중국 만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백산은 발해의 옛 수도 상경용천부가 있던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을 주목했다. 그는 대규모 토지를 매입하고, 송화강의 지류인 무단강(牡丹江) 상류 일부를 석축으로 막아 수로를 건설해 '발해농장'을 조성했다. 백산상회 지배인 출신으로 금광 개발에 성공한 김태원의 재정적 도움이 컸다. 발해농장은 만주를 거점으로 하는 새로운 국외 독립운동기지였다.
이주 농민과 2세들에게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는 민족정신과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를 위해 발해 보통학교가 설립되고 백산이 교장을 맡았다.
백산이 일구었던 발해농장의 현재 모습. /진재운 하성창
1934년에는 대종교 총본사를 발해농장 부근으로 옮기도록 했다. 1909년 나철이 '단군교(檀君敎)'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대종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1919년 2월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명 중 25명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조소앙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는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을 비롯해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유동열,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박용만,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안창호, 윤세복, 황상규 등 39인이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제헌의회)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의 주역인 서일, 김좌진, 이범석 등의 북로군정서도 대종교가 양성한 군사조직이었다. 대종교는 민족 정체성의 원천이었지만, 만주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참패로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일제는 더욱 예민해졌다. 1942년 10월에 발생한 조선어학회사건을 빌미로 편지를 날조해 대종교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였다고 하면서 대종교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대종교 3대 도사교(교단 최고 책임자) 윤세복과 안희제 등 모두 25명이 잡혀 들어가 고문을 받다가 열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른바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백산은 9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출옥 3시간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일제 강점기 대종교는 민족해방의 상징이었다. 윤동주 송몽규가 다닌 간도의 명동학교 설립자 김약연 목사는 교실에 단군 초상화를 걸었고, 예배당엔 십자가와 단군기를 나란히 걸었을 정도였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에서도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총리, 안호상 문교부 장관, 명제세 심계원장(예산처장), 정인보 감찰위원장(감사원장) 등이 대종교 교도였고, 신생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를 단군기원(檀紀)으로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위해 1953년 이후 이범석과 그 세력을 탄압하면서 대종교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제헌국회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무시하고 개신교의 하나님에게 감사기도를 드리자고 했던 이승만에게는 대종교는 일시적 이용의 대상일 뿐이었다. 독립군을 토벌했던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에게도 대종교는 불편한 존재였다. 대종교는 한국 사회에서 국수주의적 신화로 매도되었고, 독립운동의 제단에 가장 많은 피를 바쳤던 대종교는 그렇게 역사에서 지워져 갔다.
대종교의 성지인 강원도 태백산 천제단. /김석환
1945년 해방 당시 0.5%였던 개신교 신자 비율은 이제 20%에 이른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하느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발언하는 목사의 지휘 아래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고 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耶非耶)"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 필자는 KNN 사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고인돌과 인공지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콘텐츠와 한국 언론기업의 문제에서부터 산업혁명 이후 헤게모니를 둘러싼 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 생성형 인공지능, 플랫폼,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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