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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망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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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가곡동에 있는 현재의 세종중고등학교. 백성현 기자
내가 '황용주 전기'를 쓰게 된 이유1947년 밀양고등공민학교로 출발하여 1952년에 정식으로 학교법인으로 설립된 세종고등학교는 해방 직후 밀양의 중요한 인재 집합소이자 청년 양성소였다. 빨강, 파랑, 하양, 3색을 엮은 세종고의 모표는 프랑스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 세종고의 자매학교인 산내면 동강중학교도 동일한 디자인의 모표를 쓴다. 프랑스 예찬론자였던 초대 교장 황용주 선생의 고안이다 (동강중학교 설립자 황의중 이사장님은 금년 102세로 향토사의 산 증인으로 엄 바다이야기고래출현 존해 계신다). 2대 교장이 내 아버지, 그리고 3대 교장이 신학상 선생 (신영복의 부친)이다. 세종이라는 교명과 교가의 작사자는 신 선생이다 (곡은 윤이상 선생이 붙였다). 세 분 중에 신 선생님이 훨씬 선배고 내 아버지가 가장 연소자다. 세 분은 각각 성장 배경과 사상과 정치적 입장이 달랐지만 모두 시종일관 이승만 자유당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 10원야마토게임 지했다.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직 교육감이던 신학상 선생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했다. 세종학원의 설립자이자 재단이사장인 신현대 씨는 평산 신씨 일가인 신학상 후보를 후원했고 교장 황 선생과 평교사 내 아버지도 마음을 보탰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후세인들은 신영복 선배와 나의 관계를 추론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한 악의적 언론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릴게임모바일 나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신영복을 들면서 나와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덧붙였다.
역사는 기록과 기억을 두고 벌이는 후세인의 싸움이라지만 세 분의 후손 누구도 과거를 들추어 따질만한 현재의 이해관계가 없다.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복기할 입장도 아니지만 설령 오해이든 진실이든 윗대 어른들 사이에 불편한 역사가 있었더라도 침 야마토게임다운로드 묵으로 넘기는 예의를 지켰다. 신영복 선배가 귓속말로 내게 속삭였다. "우리 못다 한 말은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저세상에서 만나면 그때 이야기 하지." 김수행(1942-2015) 선배의 영결식장에서였다. 동료의 갑작스런 비보를 듣고 병원 입원 중에 잠시 외출하여 푸석푸석한 얼굴로 고인과의 동지애를 회억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자신도 뒤따 릴게임모바일 라 갔다.
세종중고와 밀양시 산내면 동강중학교는 모표가 같다. 3색은 프랑스 혁명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를 상징한다. 세종고 초대 교장이었던 황용주가 고안했다.
1955년 내 아버지는 '밀려난' 황 교장의 후임자로 새 교장이 되었다. 구구한 뒷이야기가 따른다. 정치적 이념과 노선 차이도 갈등에 한몫했기에 후유증도 적지 않아 내 아버지도 1년 만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원로 신학상 선생이 취임했으나 신 선생님 또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어쨌든 울분을 안고 세종학교를 떠난 황 선생으로는 전화위복이랄까. 부산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후 교수와 언론인으로 빛을 발했다. 1960년 정월, 부산일보 주필 시절에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해 온 대구사범학교 동기생 박정희 장군을 만난다. 나라의 근대화와 통일의 초석을 놓아야 할 군인의 사명감을 고취해 쿠데타를 부추기고 이를 '민족주의 혁명'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준다. 그 뒤 성공한 '5.16 혁명'의 공로자로 영일을 누리다가 1964년 11월, 〈강력한 통일정부에의 의지〉라는 제목의 논설을 써서 반공법 위반으로 제거된다. 내가 황용주 선생 전기를 집필한 숨은 이유 중 하나는 윗대의 악연을 품어 안고 싶은 욕망 때문이기도 했다. 유족에게서 건네받은 선생의 평생 일기장 속에서 내 아버지에게 적은 구절이 마음의 짐이 되기도 했다. "안형, 고맙소. 이런 훌륭한 아들을 남겨 주어서."(안경환,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까치, 2013)
교장 부인인 어머니는 양재점을 열었다. '가람 양재점' 간판을 내달던 날을 기억한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가람'이 무슨 뜻이냐고 내가 물었더니 어떤 분이 강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일본의 불교대학에 잠시 적을 두었던 사실을 감안하여 가람(伽藍)이란 뜻도 함께 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의 양재점에는 《主婦の友》 《裝苑》 《映畵の友》 《文藝春秋》 등 일본 잡지가 즐비했다. 일본 서적이 지천으로 깔린 부산에서 정기적으로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밀양에는 영화관이 여럿 있었고 그중 가장 큰 내일동의 한양극장에서는 외국 영화를 자주 상영했다. 2학년 즈음 서울에서 손님이 와서 어머니를 따라 영화 〈햄릿〉을 보았다. 포스터에 나온 칼싸움 장면을 기대했는데 왕자가 말만 많고 잠옷을 입고 설치는 꼴이 매우 이상했다. 영국 궁정 의상이 내 어린 눈에는 잠옷으로 비쳤던 것이다. 먼 훗날 참으로 우연하게도 동급생 여학생의 글에서 그도 나와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름 아닌 황용주 선생의 딸, 란서도 부모님과 함께 이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그 잠옷 차림의 왕자가 바로 세기의 명우 로렌스 올리비에였다. (안경환, 《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2. 105~130쪽)
멋쟁이 신식 여성이었던 어머니. 아버지가 교장 시절 '가람 양재점'을 열었다.
부모님의 이혼아마도 내가 3학년, 동생이 1학년 때 일이 아닌가 싶다. 어느 일요일 아침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버지가 우리 형제를 끌고 나가서 길 가 전봇대에 묶었다. 나는 아버지가 사라지기 무섭게 결박을 풀고 동생더러 함께 도망치자고 했다. 그러나 착한 동생은 아버지가 직접 풀어줄 때까지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미 상황이 끝났다는 취지로 이야기했으나 동생이 수긍하지 않기에 혼자 자리를 피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동생의 결박을 풀어주자 동생은 도로 묶어달라고 애원했다고 했다. 동생은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술 마시고 늦잠 잔 어른이 잘못인가? 아침 일찍 일어나 떠드는 아이들이 잘못인가?"
물론 나에게 체벌이 아주 낯선 일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에게서도 가끔 회초리를 맞곤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매질에는 절차가 있었다. 왜 내가 매를 맞아야 하는지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각종 크기의 회초리 중에 내 잘못에 상응하는 매를 고르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매질은 절차가 없었다. 대체로 순간적인 폭발이었다. 이럴 때 나는 아버지가 화가 난 이유가 따로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평소에 아버지는 결코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에게 매를 들 때는 홀로 감당 못 할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아마도 그날 우리 형제에게 가한 폭력은 사실상 어머니를 겨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그때 이미 부부 사이가 파탄에 이르렀던 것 같다.
마침내 두 분은 갈라섰고 영문도 모른 채 우리 형제는 다시 청운의 할머니 품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내게 "네 어미는 죽었다. 그렇게 알아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덧붙여서 "네 동생에게도 그리 가르쳐라"라고 다짐을 두셨다. 나는 위급한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엄마' 소리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혼자서 모진 수련을 했다. 그 부자연스런 훈련 끝에 마침내 '엄마' 대신 '할머니'를 외치게 되었다.
아버지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표면에 내건 핑계는 구구하지만 본질은 이승만 정부에 맞서는 정치세력을 규합한 죄였다.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실이 있다. 아버지는 밀양에 2년제 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새로운 청년 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당국의 설립 허가를 받을 것을 전제로 학생을 모집했다. 공설운동장으로 향하는 솔밭 샛길 입구에 가건물이 있었다. 한문으로 '법정학관(法政學館)'이라는 나무 간판을 보았고 임시 관장실에서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뚜렷하다. 그러나 법정학관은 당국의 최종 허가를 얻지 못하고 아버지의 몰락과 함께 문을 닫았다. 경찰서에 감금된 지 한 주일 만에 고향을 영원히 떠날 것을 조건으로 아버지는 석방되었다.
1956년 6월 27일 나는 월산초등학교로 돌아왔다. 2년 만의 청운 귀환은 아버지와의 별리,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읍내 근대 문물과의 이별이었다. 월산학교는 낯설었다. 2년 전 입학식 때는 학생이 120명 두 반이었는데 그동안 60여 명으로 줄어 남녀 합하여 한 반뿐이었다. 3학년을 한 학기 이상 다닌 터인데도 학적부에 적힌 담임 선생의 이름도 낯설고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동급생들은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당시 나는 심리적 공황 상태에 있었던 모양이다. 학적부의 특기사항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인내성이 부족하고 고립성이 많다." 필시 그랬을 것이다.
월산학교는 교가도 교복도 없었다. 나는 떠나온 밀양초등학교의 단정한 교복이 그리웠고 교가와 응원가가 수시로 입가에 맴돌았다. "남천강 푸른 줄기 감돌아든 푸른 들에, 찬란한 전통 세워 자리 잡은 배움터" (양명문 작사, 김동진 작곡)
다시 포플러 신작로를 걸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 화악산 위에 걸린 구름을 바라보았다. 삼문동 2층집의 아담한 정원이 그리웠고, 4년 전에 떠나온 서울이 더욱 그리워졌다. 수천 번 다짐했다. 내 반드시 서울을 찾으리라. 그곳에는 내 '죽은'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내가 '황용주 전기'를 쓰게 된 이유1947년 밀양고등공민학교로 출발하여 1952년에 정식으로 학교법인으로 설립된 세종고등학교는 해방 직후 밀양의 중요한 인재 집합소이자 청년 양성소였다. 빨강, 파랑, 하양, 3색을 엮은 세종고의 모표는 프랑스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 세종고의 자매학교인 산내면 동강중학교도 동일한 디자인의 모표를 쓴다. 프랑스 예찬론자였던 초대 교장 황용주 선생의 고안이다 (동강중학교 설립자 황의중 이사장님은 금년 102세로 향토사의 산 증인으로 엄 바다이야기고래출현 존해 계신다). 2대 교장이 내 아버지, 그리고 3대 교장이 신학상 선생 (신영복의 부친)이다. 세종이라는 교명과 교가의 작사자는 신 선생이다 (곡은 윤이상 선생이 붙였다). 세 분 중에 신 선생님이 훨씬 선배고 내 아버지가 가장 연소자다. 세 분은 각각 성장 배경과 사상과 정치적 입장이 달랐지만 모두 시종일관 이승만 자유당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 10원야마토게임 지했다.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직 교육감이던 신학상 선생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했다. 세종학원의 설립자이자 재단이사장인 신현대 씨는 평산 신씨 일가인 신학상 후보를 후원했고 교장 황 선생과 평교사 내 아버지도 마음을 보탰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후세인들은 신영복 선배와 나의 관계를 추론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한 악의적 언론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릴게임모바일 나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신영복을 들면서 나와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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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밀양에는 영화관이 여럿 있었고 그중 가장 큰 내일동의 한양극장에서는 외국 영화를 자주 상영했다. 2학년 즈음 서울에서 손님이 와서 어머니를 따라 영화 〈햄릿〉을 보았다. 포스터에 나온 칼싸움 장면을 기대했는데 왕자가 말만 많고 잠옷을 입고 설치는 꼴이 매우 이상했다. 영국 궁정 의상이 내 어린 눈에는 잠옷으로 비쳤던 것이다. 먼 훗날 참으로 우연하게도 동급생 여학생의 글에서 그도 나와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름 아닌 황용주 선생의 딸, 란서도 부모님과 함께 이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그 잠옷 차림의 왕자가 바로 세기의 명우 로렌스 올리비에였다. (안경환, 《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2. 105~130쪽)
멋쟁이 신식 여성이었던 어머니. 아버지가 교장 시절 '가람 양재점'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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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내게 "네 어미는 죽었다. 그렇게 알아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덧붙여서 "네 동생에게도 그리 가르쳐라"라고 다짐을 두셨다. 나는 위급한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엄마' 소리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혼자서 모진 수련을 했다. 그 부자연스런 훈련 끝에 마침내 '엄마' 대신 '할머니'를 외치게 되었다.
아버지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표면에 내건 핑계는 구구하지만 본질은 이승만 정부에 맞서는 정치세력을 규합한 죄였다.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실이 있다. 아버지는 밀양에 2년제 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새로운 청년 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당국의 설립 허가를 받을 것을 전제로 학생을 모집했다. 공설운동장으로 향하는 솔밭 샛길 입구에 가건물이 있었다. 한문으로 '법정학관(法政學館)'이라는 나무 간판을 보았고 임시 관장실에서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뚜렷하다. 그러나 법정학관은 당국의 최종 허가를 얻지 못하고 아버지의 몰락과 함께 문을 닫았다. 경찰서에 감금된 지 한 주일 만에 고향을 영원히 떠날 것을 조건으로 아버지는 석방되었다.
1956년 6월 27일 나는 월산초등학교로 돌아왔다. 2년 만의 청운 귀환은 아버지와의 별리,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읍내 근대 문물과의 이별이었다. 월산학교는 낯설었다. 2년 전 입학식 때는 학생이 120명 두 반이었는데 그동안 60여 명으로 줄어 남녀 합하여 한 반뿐이었다. 3학년을 한 학기 이상 다닌 터인데도 학적부에 적힌 담임 선생의 이름도 낯설고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동급생들은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당시 나는 심리적 공황 상태에 있었던 모양이다. 학적부의 특기사항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인내성이 부족하고 고립성이 많다." 필시 그랬을 것이다.
월산학교는 교가도 교복도 없었다. 나는 떠나온 밀양초등학교의 단정한 교복이 그리웠고 교가와 응원가가 수시로 입가에 맴돌았다. "남천강 푸른 줄기 감돌아든 푸른 들에, 찬란한 전통 세워 자리 잡은 배움터" (양명문 작사, 김동진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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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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