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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망유린
조회 4회 작성일 25-11-28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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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 ‘월드 클래스’ 스포츠 스타 손기정의 외아들 손정인씨는 본지 인터뷰에서 “강직하고 고지식한 양반이었다”고 회상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손기정이 결승선을 끊는 장면을 얹어 연출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어떤 장면은 시대를 뛰어넘는 집단적 기억이 된다.
1936년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의 첨병인 나치 독일이 개최한 베를린 올림픽. 대미는 마라톤 경기였다. 역시 침략 야욕으로 뻗어나가던 일본의 국가대표가 2시간 29분 19초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2시간 30분의 벽이 인간의 한계로 여겨지던 때였다.
바다이야기게임기 왜소한 스물네 살 금메달리스트가 시상대에 섰다. 42.195㎞를 뛰고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런데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 울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식민지 청년은 올림픽에서 우승자의 국가가 연주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상품인 월계수 묘목으로 가슴에 새겨진 부끄러운 일장기를 가렸다.
패배와 절망의 땅에서 릴박스 자라나 오직 두 다리와 심장으로 세계를 제패한 순간, 승리를 바칠 조국은 거기 없었다. 망국(亡國)의 영웅 손기정은 그렇게 역사의 화석으로 각인됐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서 1위로 골인한 손기정 선수가 시상대에 선 모습. 월계수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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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손기정 스토리는 불의한 정치를 넘어서는 숭고한 스포츠 정신을 상징한다. 지난 16일 경기도 제2자유로에서 열린 제21회 손기정 평화마라톤 대회엔 그의 올림픽 배번호 ‘382’를 써 붙인 각국의 러너 2만여 명이 참가했다. 올해 광복 80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 손기정 특별전처럼 정부 행사로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격상돼 치러졌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수많은 손기정들이 달려 나가는 모습을 그의 외아들 손정인(82·재일민단 고문)씨가 지켜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신 듯하네요. 아버지의 정신을 바라보며 미래를 열어 나가는 모습에 자식으로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일본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손씨는 2 바다신2다운로드 002년 별세한 아버지의 23주기를 맞아 한국을 찾았다. 마지막 귀향이라고 했다. 본지와 만난 그는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살아낸 아버지, 그리고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담담히 털어놨다.
지난 11월16일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제21회 손기정평화마라톤대회에서 참가자 2만여명이 제2자유로로 달려나가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아버지, 이제 마지막입니다
-11월 15일이 기일이지요.
“네, 14일 입국하자마자 대전 국립현충원부터 가서 참배했어요. 나라에서 잘 관리해주고 있더군요. 마침 연세대에서 아버지를 기리는 국제 학술 대회를 하고 마라톤도 있으니 내가 보탬이 될까 해서 왔지요.”
-한국 오랜만에 오셨죠?
“3년 만에 와봤어요. 내가 나이가 먹어 몸이 많이 괴로워요. 아내도 치매를 앓고 있고…. 이때가 춥잖아요. 올해 다녀가면 그만이라고. 아버지 영전에 ‘저 오는 건 이제 오와리(終わり·끝)입니다’라고 인사 드렸어요.”
-그렇군요. 일본에선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저 빠듯하게 살지요.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고 나서 정식 유학생 1기생으로 1968년 일본에 갔어요. 중앙대 나와 군대까지 다녀온 후에요. 나는 아버지의 강한 면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에 아버지를 제대로 알리려고 노력했고요. 그런데 이렇게 약해져 버렸어요. 조국이 이렇게 아버지를 기억해주니 그저 감개무량합니다.”
손정인씨가 아버지의 기일인 11월 15일 연세대에서 열린 평화스포츠 국제세미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일본에 간 계기는요.
“1960년대는 한국이 어려우니 어떻게든 해외에 나가려 하던 시대였어요. 나는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 뜻에 따라 메이지(明治)대학에 갔어요. 아버지는 일본 밑바닥, 그 설움 속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인정받지 못했어요. ‘내가 못 한 일, 너는 해봐라’ 하신 거지요.”
-57년을 사셨는데, 일본에 귀화하셨나요?
“할 수도 있었지만 안 했어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결혼해 딸 둘 키우며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20년간 밥장사했어요. 야키니쿠(燒肉·한국식 불고기)집. 재일교포인 아내가 거의 도맡아 식당을 꾸렸어요. 이사만 열 번 넘게 할 정도로 어려웠어요.”
-아버님의 도움이나 유산이 없었나요?
“전혀. 제가 유학 떠난 직후 아버지가 파산했거든요. 아들이 손 벌릴 상황이 아니었어요. 일본서 살아남으려 돈 벌기 급급했죠. 내가 속한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 아버지를 가끔 모셔다 밥 사드리고 용돈도 주고 그랬어요. 재일교포 사회에선 여전히 아버지가 영웅이었거든.”
노년의 손기정이 곤궁하게 지낸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후처(김원봉씨·1972년 별세)가 손기정 체육관 건립 자금 등을 모은다며 월 3부짜리 어음을 발행했다 부도가 나 빚더미에 오른 것. 손기정은 부도수표 발행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국금지까지 당했다. “손기정이 재산을 일본으로 빼돌렸다더라”는 말도 돌았다.
손정인씨는 “한일 양국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도움을 줬지만 생활은 내내 어려웠다”며 “워낙 강직하고 고지식한 양반이라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문제아, 두 다리가 묶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광복 80년을 맞아 손기정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를 연말까지 열고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과 월계관, 특별 부상품이었던 고대 그리스 투구 등 전시품 18건을 선보인다. 배경은 손기정이 당시 유럽에서 팬들에게 해준 사인. /뉴시스
영웅의 삶은 고단했다. 1912년 평북 신의주 빈농에서 태어나 새끼줄로 동여맨 고무신이 찢어지도록 압록강변을 뛰던 때도, 일본 나고야의 우동집에서 일하며 새벽마다 몰래 연습할 때도, 조선인을 배제하려는 일본의 치졸한 방해 공작을 뚫고 올림픽 출전권을 따낼 때도, 베를린의 안중근 의사 사촌 집에서 태극기를 처음 봤을 때도.
마침내 세계를 제패했지만 식민지 청년에게 활로는 없었다. 일본은 유럽에서 일장기를 뗀 채 ‘KOREAN 손긔졍’이란 사인에 한반도 지도까지 그리고 다닌 ‘조선의 문제아’가 민족 감정에 불을 붙일까 봐 신경질적으로 통제했다. 조선총독부는 “더 이상 육상을 하지 않겠다”는 은퇴 각서를 받고야 메이지대 진학을 허락했다. 한창 나이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두 다리를 묶어버린 것이다.
-아흔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하코네역전(일본 최대 대학 육상전)에서 달리고 싶었다’고 하셨다면서요.
“메이지대 경주부에서 ‘한 구간이라도 뛰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런 약속이 있으니 달릴 수 없었지요. 달리기만 해온 뜀꾼에게 육상 금지라니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어요.”
-그러면서 일제는 태평양전쟁 학도병 모집 연설엔 강제 동원했지요.
“어쩔 수 없었죠. 아버지는 조선 젊은이들에게 ‘천황 폐하를 위해 죽어라’ 말하고 다녀야 했던 걸 평생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했어요.”
미 군정기였던 1947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결승선을 들어오는 서윤복 선수. 손기정 선생이 키워낸 제자가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 해외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다. 2023년 영화 '1947 보스톤'으로도 제작됐다.
-손기정 선생은 광복 후에야 ‘조선마라손보급회’를 만들어 육상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지요. 미 군정기였던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첫 제자인 서윤복 선수가 우승하고, 1950년엔 1·2·3위를 석권했습니다. 혹시 그때 아버님 모습 기억나세요?
“그 시절 기억은 없어요. 내가 돌도 되기 전 어머니(육상선수 강복신씨·1944년 29세로 별세)가 돌아가셔서, 누나(손문영씨·85세)와 함께 신의주 큰아버지 댁에서 자랐거든요. 아버지는 서울서 제자 키우는 데 여념 없었고요. 우리 남매는 새어머니를 따라 전쟁 전 38선 넘어 서울로 왔어요. 1·4 후퇴 때 아버지를 만났죠. 안암동 우리 집은 마라톤 합숙소와 같아, 먹고 자며 뛰는 장정들로 가득했어요.”
-아드님도 육상을 했을 법한데요.
“보고 배운 게 그거라 나도 뜀박질 좀 했지요. (아버지가 다닌 육상 명문) 양정중·고 육상부에 들어갔고요. 양정·배재 대항 경기 때 400m를 뛰기도 했는데…”
-기록이?
“기록은 무슨, 꼴찌했지. 나갔다 하면 아버지 이름 석 자가 먼저 나오니 내가 머리가 무거워 못 뛰겠더라고. 핑계지.(웃음)”
-그래서 안 하셨어요?
“아버지는 처음부터 내가 육상하는 걸 반대했어요. 너무 힘든 길이라고요. 당신은 일정 때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 이 악물고 달렸지만, 아들은 공부해 출세하기를 바랐어요. 모교에 찾아와 ‘이놈 육상 시키면 여기 심은 월계수 나무(손기정이 베를린에서 가져와 심은 올림픽 우승 상품)를 뽑아버리겠다’ 노발대발하셨다고.”
손정인씨가 16일 손기정평화마라톤대회가 열린 스타디움에서 러너들을 바라보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영웅을 놔주지도 품지도 않았다
손기정 부자(父子)의 일생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이 축약돼 있다. 일본에선 놔줄 수도 품을 수도 없는 영원한 이방인, 고향인 북한에선 지워진 영웅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를 향한 시선은 복잡했다.
-북한이 신의주 출신 영웅을 납치하려 했지요.
“김일성이 ‘손기정을 생포해 오라’ 했다더군요. 나도 유학 시절 함정에 빠질 뻔했고요.”
-1970년대 재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게 그래서인가요?
“민단(친한·보수 재일 단체)에서 내게 장학금을 준 사람이 있는데, 알고 보니 조총련(친북 재일 단체) 스폰서이기도 했던 거예요. 날 이북으로 납치하려 했다더군. 그 일로 안기부 조사도 받았어요.”
-한국에선 ‘손기정이 친일이냐 반일이냐’ 논란도 있었습니다.
“누구는 ‘손기정은 일장기 달고 금메달 따 평생 일본만 바라보고 산 친일파’라 하고, 누구는 ‘우리가 못나서 나라를 빼앗겼는데, 선진 마라톤을 가르쳐준 일본을 욕하며 반일 선동한다’고 했어요. 어찌 보면 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복잡한 사정을 있는 그대로 봐야지, 현재의 눈으로 재단하면 과거가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는 거요.”
-일본인들은 손기정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나요?
“아는 사람은 다 알지요. 겉으로 인정 안 할 뿐이지. 젊은 사람들은 배운 적이 없어 모르고요.”
-공식적으로 일본의 유일한 남자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아닙니까.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연 박물관에 역대 금메달리스트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는데 아버지를 맨 앞에 배치했어요. 일본인처럼. 정작 일본은 생전 아버지에게 포상한 적 없어요. 봄가을로 역대 메달리스트를 발굴해 문화상 같은 걸 주는데 늘 아버지만 빠졌다고. 뜻있는 일본 정치인과 학자들이 손기정을 대우하라고 나섰지만 역부족이었죠.”
2020년 세워진 도쿄올림픽 주 경기장 인근 올림픽 박물관 내 '역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를 전시하는 코너에 1936년 베를린의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최상단에 배치한 모습. 일본은 생전의 손기정에겐 국내 메달리스트에게 주는 포상이나 장례식 조문을 하지 않았다./연합뉴스
-돌아가실 때는요?
“2002년 서울 장례식에 일본 정부는 조문이나 조화 하나 보내지 않았어요. 메이지대와 일부 인사가 충격을 받고 뒤늦게 추모식을 열어줬습니다.”
-이젠 기념행사도 없겠군요.
“없지요. 손기정은 일본에서 아주 불편한 주제니까요.”
스포츠를 통한 평화를 꿈꿨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손기정 선수 공식 국적은 아직 일본입니다. 한국에선 내년 베를린 올림픽 제패 90년을 맞아 손기정의 당시 국적을 한국으로 정정하자는 캠페인이 일고 있는데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손기정이 재조명되면서 국적 정정 운동도 추진되기 시작했어요. 아버지 우승 상품이었던 그리스 청동 투구도 그 무렵 재독 교포의 도움으로 50년 만에 돌아왔고요. 그런데 국적 문제만큼은 일본올림픽위원회(JOC)가 막고 있으니 IOC도 못 움직이지요.”
-‘당시 조선이란 나라는 없었고, 손기정이 일본 국적이었던 것은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란 입장으로 압니다만.
“그럼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을 불법으로 강점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왜 인정 안 합니까? 일장기 달고 올림픽 나간 게 손기정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니잖아요. 강제로 붙여놓은 국적에 침묵하면 잘못된 역사 전체를 인정하는 꼴이 돼요. 난 설사 실패하더라도, 국적 정정을 요구하는 운동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일제의 방해로 손기정이 받지 못했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상품인 그리스 청동 투구는 50년만인 1986년에야 돌아왔다. 당시 조선일보 지면. /조선일보DB
-아버님도 국적이 바로잡히길 원하셨나요?
“평생 가슴에 맺힌 응어리지요. 대놓고 말은 안 했어요. 자식한테 피해가 갈까 봐 그랬겠지요. 한일 수교 60년이라는데, 일본이 손기정 문제 하나만 해결해 줘도 양국 관계의 큰 대들보가 될 거예요.”
-일본에 대한 아버님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맹목적인 적개심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양국이 과거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손기정은 1951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일본의 다나카 시게키가 우승하자 “아시아의 승리”란 축전을 보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땐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며 기뻐했다. 손정인씨는 “아버지는 ‘전쟁에선 승자도 총을 맞으면 죽지만, 스포츠에선 승자와 패자가 친구도 될 수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조국, 눈물이 난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했을 때 손기정 선생이 현장에 계셨지요.
“건강도 안 좋은데 돈을 어떻게 구했는지 자비로 날아가셨더라고요. 마침 경기일이 8월 9일, 베를린에서 뛴 날과 같아 예감이 좋다고요. 태극 마크 단 황 선수가 금메달을 아버지 목에 걸어드렸어요.”
-그랬지요.
“곧이어 도쿄에서 팔순 잔치를 열었는데 교포 150명이 모였어요. 영감이 황영조 이야기로 마이크를 안 놓으시는 거야. ‘내가 두 번 우승한 심정이다, 오래 산 보람이 있다’며 눈물이 그치지 않더라고요. 나중에 황 선수는 석사 논문을 ‘손기정의 생애와 사상’으로 썼지요.”
1992년 8월 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왼쪽)와 축하하는 손기정옹.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날도 8월 9일이었다. /조선일보DB
-이제 한국 육상엔 이렇다 할 얼굴이 없습니다.
“너무 편해져서, 달려야 할 이유가 없어져서인가요. 동기 부여하도록 지원을 해주면 좋겠어요.”
-평생 영웅의 아들로 산다는 건 어땠습니까?
“관(冠) 머리가 무거웠죠. 지켜보는 눈이 많아 늘 조심했어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도둑질을 했을지도 모르지.”
-한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습니까.
“오고 싶어도 이 나라가 너무 좋아지고 비싸져서 내 한 몸 붙일 데가 없어요. 요코하마 맨션 팔아 서울 아파트 열 평도 못 산다고.(웃음)”
-세계에서 K문화가 인기입니다. 감회가 어떤가요.
“일본에서도 한류가 난리예요. 얼마 전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한국 걸그룹이 공연한 프로를 봤어요. 이어서 89년 전 아버지 우승 사진이 나오더군요. 내가 그날 밤 한숨도 못 잤어요. 이 좋은 시대를 누리는 사람들은 우리 세대가 겪은 걸 다 이해 못 할 텐데…. 이렇게 발전한 나라가 돼줘 고맙소.”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기자 admin@no1reelsi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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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와 절망의 땅에서 릴박스 자라나 오직 두 다리와 심장으로 세계를 제패한 순간, 승리를 바칠 조국은 거기 없었다. 망국(亡國)의 영웅 손기정은 그렇게 역사의 화석으로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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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수많은 손기정들이 달려 나가는 모습을 그의 외아들 손정인(82·재일민단 고문)씨가 지켜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신 듯하네요. 아버지의 정신을 바라보며 미래를 열어 나가는 모습에 자식으로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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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16일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제21회 손기정평화마라톤대회에서 참가자 2만여명이 제2자유로로 달려나가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아버지, 이제 마지막입니다
-11월 15일이 기일이지요.
“네, 14일 입국하자마자 대전 국립현충원부터 가서 참배했어요. 나라에서 잘 관리해주고 있더군요. 마침 연세대에서 아버지를 기리는 국제 학술 대회를 하고 마라톤도 있으니 내가 보탬이 될까 해서 왔지요.”
-한국 오랜만에 오셨죠?
“3년 만에 와봤어요. 내가 나이가 먹어 몸이 많이 괴로워요. 아내도 치매를 앓고 있고…. 이때가 춥잖아요. 올해 다녀가면 그만이라고. 아버지 영전에 ‘저 오는 건 이제 오와리(終わり·끝)입니다’라고 인사 드렸어요.”
-그렇군요. 일본에선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저 빠듯하게 살지요.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고 나서 정식 유학생 1기생으로 1968년 일본에 갔어요. 중앙대 나와 군대까지 다녀온 후에요. 나는 아버지의 강한 면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에 아버지를 제대로 알리려고 노력했고요. 그런데 이렇게 약해져 버렸어요. 조국이 이렇게 아버지를 기억해주니 그저 감개무량합니다.”
손정인씨가 아버지의 기일인 11월 15일 연세대에서 열린 평화스포츠 국제세미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일본에 간 계기는요.
“1960년대는 한국이 어려우니 어떻게든 해외에 나가려 하던 시대였어요. 나는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 뜻에 따라 메이지(明治)대학에 갔어요. 아버지는 일본 밑바닥, 그 설움 속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인정받지 못했어요. ‘내가 못 한 일, 너는 해봐라’ 하신 거지요.”
-57년을 사셨는데, 일본에 귀화하셨나요?
“할 수도 있었지만 안 했어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결혼해 딸 둘 키우며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20년간 밥장사했어요. 야키니쿠(燒肉·한국식 불고기)집. 재일교포인 아내가 거의 도맡아 식당을 꾸렸어요. 이사만 열 번 넘게 할 정도로 어려웠어요.”
-아버님의 도움이나 유산이 없었나요?
“전혀. 제가 유학 떠난 직후 아버지가 파산했거든요. 아들이 손 벌릴 상황이 아니었어요. 일본서 살아남으려 돈 벌기 급급했죠. 내가 속한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 아버지를 가끔 모셔다 밥 사드리고 용돈도 주고 그랬어요. 재일교포 사회에선 여전히 아버지가 영웅이었거든.”
노년의 손기정이 곤궁하게 지낸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후처(김원봉씨·1972년 별세)가 손기정 체육관 건립 자금 등을 모은다며 월 3부짜리 어음을 발행했다 부도가 나 빚더미에 오른 것. 손기정은 부도수표 발행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국금지까지 당했다. “손기정이 재산을 일본으로 빼돌렸다더라”는 말도 돌았다.
손정인씨는 “한일 양국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도움을 줬지만 생활은 내내 어려웠다”며 “워낙 강직하고 고지식한 양반이라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문제아, 두 다리가 묶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광복 80년을 맞아 손기정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를 연말까지 열고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과 월계관, 특별 부상품이었던 고대 그리스 투구 등 전시품 18건을 선보인다. 배경은 손기정이 당시 유럽에서 팬들에게 해준 사인. /뉴시스
영웅의 삶은 고단했다. 1912년 평북 신의주 빈농에서 태어나 새끼줄로 동여맨 고무신이 찢어지도록 압록강변을 뛰던 때도, 일본 나고야의 우동집에서 일하며 새벽마다 몰래 연습할 때도, 조선인을 배제하려는 일본의 치졸한 방해 공작을 뚫고 올림픽 출전권을 따낼 때도, 베를린의 안중근 의사 사촌 집에서 태극기를 처음 봤을 때도.
마침내 세계를 제패했지만 식민지 청년에게 활로는 없었다. 일본은 유럽에서 일장기를 뗀 채 ‘KOREAN 손긔졍’이란 사인에 한반도 지도까지 그리고 다닌 ‘조선의 문제아’가 민족 감정에 불을 붙일까 봐 신경질적으로 통제했다. 조선총독부는 “더 이상 육상을 하지 않겠다”는 은퇴 각서를 받고야 메이지대 진학을 허락했다. 한창 나이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두 다리를 묶어버린 것이다.
-아흔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하코네역전(일본 최대 대학 육상전)에서 달리고 싶었다’고 하셨다면서요.
“메이지대 경주부에서 ‘한 구간이라도 뛰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런 약속이 있으니 달릴 수 없었지요. 달리기만 해온 뜀꾼에게 육상 금지라니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어요.”
-그러면서 일제는 태평양전쟁 학도병 모집 연설엔 강제 동원했지요.
“어쩔 수 없었죠. 아버지는 조선 젊은이들에게 ‘천황 폐하를 위해 죽어라’ 말하고 다녀야 했던 걸 평생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했어요.”
미 군정기였던 1947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결승선을 들어오는 서윤복 선수. 손기정 선생이 키워낸 제자가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 해외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다. 2023년 영화 '1947 보스톤'으로도 제작됐다.
-손기정 선생은 광복 후에야 ‘조선마라손보급회’를 만들어 육상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지요. 미 군정기였던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첫 제자인 서윤복 선수가 우승하고, 1950년엔 1·2·3위를 석권했습니다. 혹시 그때 아버님 모습 기억나세요?
“그 시절 기억은 없어요. 내가 돌도 되기 전 어머니(육상선수 강복신씨·1944년 29세로 별세)가 돌아가셔서, 누나(손문영씨·85세)와 함께 신의주 큰아버지 댁에서 자랐거든요. 아버지는 서울서 제자 키우는 데 여념 없었고요. 우리 남매는 새어머니를 따라 전쟁 전 38선 넘어 서울로 왔어요. 1·4 후퇴 때 아버지를 만났죠. 안암동 우리 집은 마라톤 합숙소와 같아, 먹고 자며 뛰는 장정들로 가득했어요.”
-아드님도 육상을 했을 법한데요.
“보고 배운 게 그거라 나도 뜀박질 좀 했지요. (아버지가 다닌 육상 명문) 양정중·고 육상부에 들어갔고요. 양정·배재 대항 경기 때 400m를 뛰기도 했는데…”
-기록이?
“기록은 무슨, 꼴찌했지. 나갔다 하면 아버지 이름 석 자가 먼저 나오니 내가 머리가 무거워 못 뛰겠더라고. 핑계지.(웃음)”
-그래서 안 하셨어요?
“아버지는 처음부터 내가 육상하는 걸 반대했어요. 너무 힘든 길이라고요. 당신은 일정 때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 이 악물고 달렸지만, 아들은 공부해 출세하기를 바랐어요. 모교에 찾아와 ‘이놈 육상 시키면 여기 심은 월계수 나무(손기정이 베를린에서 가져와 심은 올림픽 우승 상품)를 뽑아버리겠다’ 노발대발하셨다고.”
손정인씨가 16일 손기정평화마라톤대회가 열린 스타디움에서 러너들을 바라보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영웅을 놔주지도 품지도 않았다
손기정 부자(父子)의 일생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이 축약돼 있다. 일본에선 놔줄 수도 품을 수도 없는 영원한 이방인, 고향인 북한에선 지워진 영웅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를 향한 시선은 복잡했다.
-북한이 신의주 출신 영웅을 납치하려 했지요.
“김일성이 ‘손기정을 생포해 오라’ 했다더군요. 나도 유학 시절 함정에 빠질 뻔했고요.”
-1970년대 재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게 그래서인가요?
“민단(친한·보수 재일 단체)에서 내게 장학금을 준 사람이 있는데, 알고 보니 조총련(친북 재일 단체) 스폰서이기도 했던 거예요. 날 이북으로 납치하려 했다더군. 그 일로 안기부 조사도 받았어요.”
-한국에선 ‘손기정이 친일이냐 반일이냐’ 논란도 있었습니다.
“누구는 ‘손기정은 일장기 달고 금메달 따 평생 일본만 바라보고 산 친일파’라 하고, 누구는 ‘우리가 못나서 나라를 빼앗겼는데, 선진 마라톤을 가르쳐준 일본을 욕하며 반일 선동한다’고 했어요. 어찌 보면 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복잡한 사정을 있는 그대로 봐야지, 현재의 눈으로 재단하면 과거가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는 거요.”
-일본인들은 손기정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나요?
“아는 사람은 다 알지요. 겉으로 인정 안 할 뿐이지. 젊은 사람들은 배운 적이 없어 모르고요.”
-공식적으로 일본의 유일한 남자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아닙니까.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연 박물관에 역대 금메달리스트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는데 아버지를 맨 앞에 배치했어요. 일본인처럼. 정작 일본은 생전 아버지에게 포상한 적 없어요. 봄가을로 역대 메달리스트를 발굴해 문화상 같은 걸 주는데 늘 아버지만 빠졌다고. 뜻있는 일본 정치인과 학자들이 손기정을 대우하라고 나섰지만 역부족이었죠.”
2020년 세워진 도쿄올림픽 주 경기장 인근 올림픽 박물관 내 '역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를 전시하는 코너에 1936년 베를린의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최상단에 배치한 모습. 일본은 생전의 손기정에겐 국내 메달리스트에게 주는 포상이나 장례식 조문을 하지 않았다./연합뉴스
-돌아가실 때는요?
“2002년 서울 장례식에 일본 정부는 조문이나 조화 하나 보내지 않았어요. 메이지대와 일부 인사가 충격을 받고 뒤늦게 추모식을 열어줬습니다.”
-이젠 기념행사도 없겠군요.
“없지요. 손기정은 일본에서 아주 불편한 주제니까요.”
스포츠를 통한 평화를 꿈꿨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손기정 선수 공식 국적은 아직 일본입니다. 한국에선 내년 베를린 올림픽 제패 90년을 맞아 손기정의 당시 국적을 한국으로 정정하자는 캠페인이 일고 있는데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손기정이 재조명되면서 국적 정정 운동도 추진되기 시작했어요. 아버지 우승 상품이었던 그리스 청동 투구도 그 무렵 재독 교포의 도움으로 50년 만에 돌아왔고요. 그런데 국적 문제만큼은 일본올림픽위원회(JOC)가 막고 있으니 IOC도 못 움직이지요.”
-‘당시 조선이란 나라는 없었고, 손기정이 일본 국적이었던 것은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란 입장으로 압니다만.
“그럼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을 불법으로 강점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왜 인정 안 합니까? 일장기 달고 올림픽 나간 게 손기정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니잖아요. 강제로 붙여놓은 국적에 침묵하면 잘못된 역사 전체를 인정하는 꼴이 돼요. 난 설사 실패하더라도, 국적 정정을 요구하는 운동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일제의 방해로 손기정이 받지 못했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상품인 그리스 청동 투구는 50년만인 1986년에야 돌아왔다. 당시 조선일보 지면. /조선일보DB
-아버님도 국적이 바로잡히길 원하셨나요?
“평생 가슴에 맺힌 응어리지요. 대놓고 말은 안 했어요. 자식한테 피해가 갈까 봐 그랬겠지요. 한일 수교 60년이라는데, 일본이 손기정 문제 하나만 해결해 줘도 양국 관계의 큰 대들보가 될 거예요.”
-일본에 대한 아버님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맹목적인 적개심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양국이 과거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손기정은 1951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일본의 다나카 시게키가 우승하자 “아시아의 승리”란 축전을 보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땐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며 기뻐했다. 손정인씨는 “아버지는 ‘전쟁에선 승자도 총을 맞으면 죽지만, 스포츠에선 승자와 패자가 친구도 될 수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조국, 눈물이 난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했을 때 손기정 선생이 현장에 계셨지요.
“건강도 안 좋은데 돈을 어떻게 구했는지 자비로 날아가셨더라고요. 마침 경기일이 8월 9일, 베를린에서 뛴 날과 같아 예감이 좋다고요. 태극 마크 단 황 선수가 금메달을 아버지 목에 걸어드렸어요.”
-그랬지요.
“곧이어 도쿄에서 팔순 잔치를 열었는데 교포 150명이 모였어요. 영감이 황영조 이야기로 마이크를 안 놓으시는 거야. ‘내가 두 번 우승한 심정이다, 오래 산 보람이 있다’며 눈물이 그치지 않더라고요. 나중에 황 선수는 석사 논문을 ‘손기정의 생애와 사상’으로 썼지요.”
1992년 8월 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왼쪽)와 축하하는 손기정옹.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날도 8월 9일이었다. /조선일보DB
-이제 한국 육상엔 이렇다 할 얼굴이 없습니다.
“너무 편해져서, 달려야 할 이유가 없어져서인가요. 동기 부여하도록 지원을 해주면 좋겠어요.”
-평생 영웅의 아들로 산다는 건 어땠습니까?
“관(冠) 머리가 무거웠죠. 지켜보는 눈이 많아 늘 조심했어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도둑질을 했을지도 모르지.”
-한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습니까.
“오고 싶어도 이 나라가 너무 좋아지고 비싸져서 내 한 몸 붙일 데가 없어요. 요코하마 맨션 팔아 서울 아파트 열 평도 못 산다고.(웃음)”
-세계에서 K문화가 인기입니다. 감회가 어떤가요.
“일본에서도 한류가 난리예요. 얼마 전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한국 걸그룹이 공연한 프로를 봤어요. 이어서 89년 전 아버지 우승 사진이 나오더군요. 내가 그날 밤 한숨도 못 잤어요. 이 좋은 시대를 누리는 사람들은 우리 세대가 겪은 걸 다 이해 못 할 텐데…. 이렇게 발전한 나라가 돼줘 고맙소.”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기자 admin@no1reelsi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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