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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망유린
조회 23회 작성일 26-02-07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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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러시아 제국 출신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그의 작품 세계는 러시아 민족주의, 원시주의, 신고전주의, 12 음렬 기법까지 20세기 음악사의 모든 사조를 망라한다. [사진 사회평론]
야마토릴게임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다. 기술 발전이 너무 빨라서 따라잡기 버겁다. 갈수록 변화가 더 빨라진다고 하니 기대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도대체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기술은 매 순간 새로워지고, 우리의 상식과 일상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세상이라 전문가들조차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과 유연성이 오리지널바다이야기 국가와 기업, 개인 모두에게 생존의 조건으로 크게 주목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수년간의 도제 교육과 오랜 숙련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전문성을 갖춘 장인이 되는 예술가들에게 변화를 쉽게 수용하는 것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가 없는 무능이자 타협의 상징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니 유연성은 적어도 예술가에게는 함부로 사용해서는 메이저릴게임사이트 안 되는 일종의 금기어인 셈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음악사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계속 바꿔가며 세상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던 음악가가 있었으니, 바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이다.
피카소 등과 교류…샤넬, 자택에 거처 내줘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세계는 초기 러시아 민족주의를 시작으로 거칠고 실험적인 원시주의, 1920년대 릴게임황금성 이후 신고전주의, 1950년대 이후 음렬주의와 고음악, 그리고 말년의 개성적인 12 음렬 기법까지 20세기 음악사의 모든 사조를 망라한다. 그의 독특한 예술 궤적은 단순히 취향이나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러시아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재앙과 위협 속에서 선택했던 삶의 결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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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한 장면. 샤넬이 자신의 집에 스트라빈스키의 거처를 마련해 준 일화가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사진 (주)마운틴픽쳐스]
188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 태어나 1971년 89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사망한 스트라빈스키는 삶의 대부분을 망명자로 살았다. 사교적이지 않았고 심한 독설가였지만 풍부한 교양과 예리한 지성 덕분에 주위에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에 살 때는 피카소나 엘리어트, 마티스, 앙드레 지드, 장 콕토 같은 당대 최고 예술가들과 가깝게 지내며 영감을 주고받았고, 전쟁으로 인해 오갈 데가 없어졌을 때 코코 샤넬이 자신의 집에 거처를 마련해 준 일화는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적응력과 유연성은 막히면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야만 했던 성장기 경험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러시아 최고 오페라 극장의 가수였던 아버지와 국토부 고위 관리의 딸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스트라빈스키는 어려서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과 관심을 보였지만 그의 부모는 체계적으로 음악을 가르치지 않았다. 법률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못내 잊지 못한 아버지가 그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법학대학에 입학하긴 했지만, 스트라빈스키의 관심은 온통 음악뿐이어서 그는 늘 음악원을 기웃거리며 음악 이론 과목들을 수강했다. 억지로 들어간 법학부에서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아들과 친구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이 인연으로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찾아가 자신이 작곡한 습작들을 보여주었고, 천재성을 알아본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를 바로 제자로 받아 주었다. 그뿐 아니라 이즈음 아버지를 잃은 스트라빈스키에게 빈자리를 메워 주었다. 스트라빈스키가 법대를 그만두고 음악원에 입학하려 하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음악원의 획일화된 수업 과정이 오히려 그의 독창성을 저해할 수 있다며 그에게 맞춤형 개인 지도를 해주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가르침 덕분에 탄탄한 실력을 갖춘 작곡가로 성장한 스트라빈스키는 1909년 천재적인 감각의 공연 기획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눈에 띄었다. 디아길레프는 러시아 음악으로 돌풍을 일으킨 후 러시아 발레단을 설립하여 파리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고자 새로운 인재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디아길레프는 러시아적인 이국적 개성으로 승부를 걸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공연의 주제도 신선하고 무대나 안무도 뛰어났으나 무엇보다 청중을 사로잡은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강렬한 음악이었다. 파리의 청중들은 생생한 리듬과 재치 넘치는 풍자, 그리고 화려한 관현악의 음색에 매료되었다. 1910년 초연된 ‘불새’와 이어 발표된 ‘페트루슈카’의 성공으로 스트라빈스키는 순식간에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부상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발레 안무가들에게 영원한 도전이다. 1975년 선보인 피나 바우슈의 ‘봄의 제전’. [사진 LG아트센터]
과유불급. 지나치면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1913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 올린 ‘봄의 제전’은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거친 불협화음과 복잡한 박자와 리듬이 파격적이었고, 이것이 인신 공양이라는 주제와 산 제물로 희생되는 처녀의 처절한 몸짓과 만나면서 폭동에 가까운 대소동을 일으켰다. 거리로 뛰쳐나온 청중들은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고, 횃불 시위까지 벌이는 바람에 경찰들은 밤새도록 호루라기를 불며 진정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이 스캔들은 스트라빈스키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고, 불과 1년 만에 파리의 시민들은 ‘봄의 제전’이 내포한 원시적인 생명력과 신선함을 알아보고 기립박수를 보내며 열광했다.
하지만 성공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선택한 스위스에서 그는 6년을 머물렀다. 전쟁으로 인해 유럽 공연계는 어디든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스트라빈스키는 계속 걸작들을 발표했다. 3명의 배우와 1명의 낭독자, 그리고 7명의 연주자만 있으면 공연이 가능한 ‘병사의 이야기’는 화려한 발레의 춤사위를 생략한 대신 발레와 연극, 판토마임의 절묘한 조화로 공연의 밀도를 높였다. 이어 작곡한 ‘풀치넬라’는 18세기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영감을 가져온 이른바 유랑극장용 발레였다. ‘관악기를 위한 교향곡’에서는 현악기가 하나도 없어도 매력적인 교향곡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20년, 러시아 혁명으로 사유재산까지 몰수당하자 그는 다시 프랑스행을 결정한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스트라빈스키는 당시 유행하던 낭만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가 지나치게 주관성을 강조해 청중들의 피로감이 적지 않다는 것을 빠르게 파악했다. 기회의 창을 감지한 그는 절제와 균형을 중시하던 18세기 고전주의 음악 정신으로 회귀하는 신고전주의를 주창하며, ‘오이디푸스 왕’이나 ‘시편 교향곡’ 같은 뛰어난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성경의 시편에 기초한 ‘시편 교향곡’은 물론 라틴어로 작곡된 세속극 ‘오이디푸스 왕’마저 너무나 엄숙하고 종교적이라 10년 전 ‘봄의 제전’ 때문에 야만적인 이교도라 비난받았던 작곡가의 작품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다.
‘봄의 제전’ 파격적 주제에 시위까지 발생 프랑스에서 국적까지 획득하며 20년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던 스트라빈스키는 불과 6개월 사이에 큰딸과 아내, 어머니를 차례로 잃고 본인도 폐결핵에 걸려 요양해야만 했다. 그에게는 가혹하고 불행한 시기였다. 거기에 더해 2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자 그는 다시 미국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지인도 없이 영어도 서툴렀던 상황에서 감행한 이 두 번째 이민은 말 그대로 모험이었다. 미국이 그에게 꾸준히 작품을 위촉하긴 했지만 당시 베른 저작권 협약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저작료를 안정적으로 받기 힘들었고, 따라서 작곡만 해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스트라빈스키가 아니었다. 지휘자로 변신에 성공한 그는 세계를 순회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곧 생활의 안정을 되찾았다. 게다가 말년에는 자신과 함께 현대음악의 양대 축으로 불리던 라이벌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받아들여 자신의 작품에 자연스럽게 활용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평생 적응을 잘하며 마지막까지 변신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스트라빈스키 자신은 다른 이들의 음악이 자신의 감성을 끊임없이 변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타인에게 영향받기 원하는 사람이며 남의 걸 훔치는 병적 도벽이 있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단순히 겸손의 언사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새로운 예술적 흐름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활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의 과감한 변신은 역설적으로 그 자신의 음악 정체성이 매우 확실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젊어서 고국 러시아의 음악적 토양에 깊이 파고들어 뿌리를 내린 결과 아무리 다양한 음악 어법을 흡수해도 결코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에게 있었으니까.
미래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모두들 민첩성과 유연성이 중요하단다. 그런데 유연하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는 것. 스트라빈스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러시아 제국 출신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그의 작품 세계는 러시아 민족주의, 원시주의, 신고전주의, 12 음렬 기법까지 20세기 음악사의 모든 사조를 망라한다. [사진 사회평론]
야마토릴게임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다. 기술 발전이 너무 빨라서 따라잡기 버겁다. 갈수록 변화가 더 빨라진다고 하니 기대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도대체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기술은 매 순간 새로워지고, 우리의 상식과 일상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세상이라 전문가들조차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과 유연성이 오리지널바다이야기 국가와 기업, 개인 모두에게 생존의 조건으로 크게 주목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수년간의 도제 교육과 오랜 숙련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전문성을 갖춘 장인이 되는 예술가들에게 변화를 쉽게 수용하는 것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가 없는 무능이자 타협의 상징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니 유연성은 적어도 예술가에게는 함부로 사용해서는 메이저릴게임사이트 안 되는 일종의 금기어인 셈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음악사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계속 바꿔가며 세상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던 음악가가 있었으니, 바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이다.
피카소 등과 교류…샤넬, 자택에 거처 내줘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세계는 초기 러시아 민족주의를 시작으로 거칠고 실험적인 원시주의, 1920년대 릴게임황금성 이후 신고전주의, 1950년대 이후 음렬주의와 고음악, 그리고 말년의 개성적인 12 음렬 기법까지 20세기 음악사의 모든 사조를 망라한다. 그의 독특한 예술 궤적은 단순히 취향이나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러시아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재앙과 위협 속에서 선택했던 삶의 결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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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한 장면. 샤넬이 자신의 집에 스트라빈스키의 거처를 마련해 준 일화가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사진 (주)마운틴픽쳐스]
188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서 태어나 1971년 89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사망한 스트라빈스키는 삶의 대부분을 망명자로 살았다. 사교적이지 않았고 심한 독설가였지만 풍부한 교양과 예리한 지성 덕분에 주위에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에 살 때는 피카소나 엘리어트, 마티스, 앙드레 지드, 장 콕토 같은 당대 최고 예술가들과 가깝게 지내며 영감을 주고받았고, 전쟁으로 인해 오갈 데가 없어졌을 때 코코 샤넬이 자신의 집에 거처를 마련해 준 일화는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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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법학대학에 입학하긴 했지만, 스트라빈스키의 관심은 온통 음악뿐이어서 그는 늘 음악원을 기웃거리며 음악 이론 과목들을 수강했다. 억지로 들어간 법학부에서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아들과 친구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이 인연으로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찾아가 자신이 작곡한 습작들을 보여주었고, 천재성을 알아본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를 바로 제자로 받아 주었다. 그뿐 아니라 이즈음 아버지를 잃은 스트라빈스키에게 빈자리를 메워 주었다. 스트라빈스키가 법대를 그만두고 음악원에 입학하려 하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음악원의 획일화된 수업 과정이 오히려 그의 독창성을 저해할 수 있다며 그에게 맞춤형 개인 지도를 해주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가르침 덕분에 탄탄한 실력을 갖춘 작곡가로 성장한 스트라빈스키는 1909년 천재적인 감각의 공연 기획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눈에 띄었다. 디아길레프는 러시아 음악으로 돌풍을 일으킨 후 러시아 발레단을 설립하여 파리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고자 새로운 인재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디아길레프는 러시아적인 이국적 개성으로 승부를 걸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공연의 주제도 신선하고 무대나 안무도 뛰어났으나 무엇보다 청중을 사로잡은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강렬한 음악이었다. 파리의 청중들은 생생한 리듬과 재치 넘치는 풍자, 그리고 화려한 관현악의 음색에 매료되었다. 1910년 초연된 ‘불새’와 이어 발표된 ‘페트루슈카’의 성공으로 스트라빈스키는 순식간에 유럽 최고의 작곡가로 부상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발레 안무가들에게 영원한 도전이다. 1975년 선보인 피나 바우슈의 ‘봄의 제전’. [사진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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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제전’ 파격적 주제에 시위까지 발생 프랑스에서 국적까지 획득하며 20년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던 스트라빈스키는 불과 6개월 사이에 큰딸과 아내, 어머니를 차례로 잃고 본인도 폐결핵에 걸려 요양해야만 했다. 그에게는 가혹하고 불행한 시기였다. 거기에 더해 2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자 그는 다시 미국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지인도 없이 영어도 서툴렀던 상황에서 감행한 이 두 번째 이민은 말 그대로 모험이었다. 미국이 그에게 꾸준히 작품을 위촉하긴 했지만 당시 베른 저작권 협약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저작료를 안정적으로 받기 힘들었고, 따라서 작곡만 해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스트라빈스키가 아니었다. 지휘자로 변신에 성공한 그는 세계를 순회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곧 생활의 안정을 되찾았다. 게다가 말년에는 자신과 함께 현대음악의 양대 축으로 불리던 라이벌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받아들여 자신의 작품에 자연스럽게 활용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평생 적응을 잘하며 마지막까지 변신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스트라빈스키 자신은 다른 이들의 음악이 자신의 감성을 끊임없이 변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타인에게 영향받기 원하는 사람이며 남의 걸 훔치는 병적 도벽이 있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단순히 겸손의 언사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새로운 예술적 흐름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활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의 과감한 변신은 역설적으로 그 자신의 음악 정체성이 매우 확실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젊어서 고국 러시아의 음악적 토양에 깊이 파고들어 뿌리를 내린 결과 아무리 다양한 음악 어법을 흡수해도 결코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에게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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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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