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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망유린
조회 0회 작성일 26-02-0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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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우 기자]
▲ 진안 백운면 들녘의 성수산 전경, 성수산 능선을 넘는 보현재 잊힌 고개 안부가 보인다.
ⓒ 이완우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문턱이 겹치는 입춘 절기를 하루 앞둔 지난 3일, 섬진 손오공릴게임 강 상류에서 흐르는 새 기운을 가늠해 보기 위해 전북 진안과 임실의 경계에 있는 성수산 역사 문화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섬진강 상류 진안 백운면 반송리의 두원마을을 찾았다. 진안 백운면 천상데미의 데미샘에서 샘솟아 흐르는 섬진강 상류의 작은 개울이 성수산(876m)의 동북쪽 약 7km에 걸친 산자락을 끼고 백운면 신암리 게임몰 와 반송리를 흐른다. 성수산의 산줄기는 임실 성수면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산자락은 진안 백운면 반송리와 신암리 쪽으로 깊숙이 이어지며, 사람과 사상이 오간 고갯길들을 통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 왔다.
여러 시대가 겹친 산
성수산은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의 설화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인정하 카카오야마토 지 않는 고려 말 충신 최양의 유신적 충절이 공존한다. 그리고 조선 말기의 천주교 박해와 신앙 공동체의 은거 흔적까지 안고 있는 성수산은 여러 시대의 진실과 긴장이 겹쳐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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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충신 최양 유허비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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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안 백운면 반송리의 소나무(반송). 마을의 상징
ⓒ 이완우
백운면 반송리 섬진강 개울둑에 고려 말 유신 최양 선생 유허비가 서 있다. 눈 덮인 고요 속에 선 만육 최양 유허비는 고려 유신의 담담한 충절을 품고 있고, 가지가 너르게 펼쳐진 반송은 마을을 감싸 안는 오래된 따스함과 품위를 전하고 있었다.
만육 최양(晩六 崔瀁, 1351~1424)은 정몽주(1338~1392)의 조카이다. 향토 자료는 이성계(1335~1408)의 남원 운봉 황산대첩 전투에 정몽주와 함께 종사관으로 참여하였다고 전한다. 최양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는 뜻을 달리하여 이곳 진안 백운면 신암리 중대산(장수 팔공산, 1151m) 돈적소에서 3년간 은둔하였다(관련 기사 : 기찻길 없는 섬진강 상류에 열차 정거장이라니).
▲ 진안 백운면 반송리 천주교 두원공소와 원종수 두원공소 회장 내외분
ⓒ 이완우
▲ 진안 백운면 반송리 천주교 두원공소
ⓒ 이완우
반송리의 천주교 두원공소(진안군 향토문화유산) 건물을 관리하고 있는 원종수 공소 회장을 만났다. 원종수 회장이 두원공소의 역사를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다.
"박해 시기 깊숙한 골짜기인 신암리에 여러 골짜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서 살았지요. 고중대에 몇 분이 기도 장소를 마련하여 함께 하다가, 1957년에 이곳에 내려와서 공소 터를 잡았어요. 예전에는 공소에 신자가 상당히 많았지요. 지금이야 공소가 유적지 문화유산으로 남아있고, 지금은 진안 성당으로 다니지요. 이곳 두원마을에서 주암동 골짜기로 들어서서 능선 넘으면 상이암이에요. 신암리에서 지장재를 넘어서 상이암으로 가는 고갯길이 큰길이었지요. 옛날에는 이웃집 다니듯 다녔지요. 지금은 고갯길이 다 묵어서 다닐 수 없어요."
▲ 진안 백운면 신암리 대전마을, 천주교 신자 은거지
ⓒ 이완우
▲ 진안 백운면 신암리 대전마을, 천주교 신자 은거지
ⓒ 이완우
진안 백운면 신암리 대전마을과 임신마을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반송리 두원마을에서 2km, 다시 3km를 더 올라가야 했다.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산촌으로 숨어들어 신념을 지킨 산속 삶 터를 기억하는 공간이었다. 주위 산의 풍경과 척박한 환경에 신앙을 지킨 이들의 삶의 모습과 자연의 대비가 숙연하였다.
진안군의 향토문화백과사전에 의하면 팔공산의 고중대(古中垈)에는 이 산에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체 기도 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고중대(古中垈)는 고정대(古井垈)로 '옛날부터 우물 터'라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로부터 장수에서는 금남호남정맥의 마루금의 으뜸을 팔공산(八公山)이라고 하였고, 진안에서는 중대산(中垈山)이라 하였다. 기자는 중대산(中垈山)의 어원을 민간어원설이나 구전 지명으로 정대산(井垈山)일 가능성을 추정해 보았다. 팔공산(중대산)과 연결된 산맥의 마루금은 금강과 섬진강이라는 두 강의 분수령이다. '가운데 있는 터'보다는 '샘이 있는 터'라는 의미가 지형적 특징을 훨씬 잘 나타낸다.
▲ 진안 백운면 신암리 임신마을, 천주교 신자 은거지. 진안 데미샘 방향
ⓒ 이완우
▲ 진안 백운면 신암리 임신마을, 천주교 신자 은거지. 성수산 지장재 방향
ⓒ 이완우
섬진강의 맑은 근원
섬진강의 발원지를 데미샘으로 지정한 역사는 길지 않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택리지>는 섬진강 발원지를 팔공산(중대산) 또는 마이산으로 보았다. 1983년에 이형석(하천 연구가)이 데미샘을 섬진강의 발원지로 계측하였고, 국립지리원은 이곳 데미샘을 섬진강의 최장발원지로 인증했다.
데미샘은 섬진강 500리 물길의 시작점이다. 섬진강의 맑은 근원 데미샘이 있는 진안 백운면에 성스러운 기도터인 성수산이 있다. 이성계 희망의 기도터인 상이암, 망해가는 조국(고려)를 향한 충신의 비탄과 충절의 기도터인 최양의 돈적소, 신앙을 지키며 영원한 삶을 갈구했던 기도가 메아리치던 천주교 신자들의 산골짜기 여러 기도터. 좋은 샘(데미샘)이 있는 곳에 좋은 기도터(성수산)가 어울린다.
대전마을과 임신마을을 뒤로하고, 진안 백운면 들녘으로 내려왔다. 섬진강 강변 둔치에서 성수산이 가까이 보였다. 임진로 지방도로를 경유하여 성수산 상이암까지 거의 360도를 가깝게 돌아서 가야 했다. 16km를 자동차로 성수산 기슭을 멀리 우회하여 상이암에 도착하였다.
성수산 북쪽의 진안 반송리나 신암리에서 성수산 남쪽의 상이암이나 휴양림으로 오고가는 2~3km의 지장재와 보현재의 잊힌 고갯길이 정비되어 다시 열리기를 희망해 본다. 이들 고갯길은 성수산 상이암과 섬진강 상류 데미샘이 연결되는 새로운 관광 코스가 될 듯하다. 역사와 설화가 고갯길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 성수산 상이암
ⓒ 이완우
▲ 성수산 상이암 무량수전의 단청, 기동의 염원으로 보인다.
ⓒ 이완우
성수산 상이암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구룡쟁주(九龍爭珠)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건과 이성계의 두 왕조 창업 군주가 한 곳에서 하늘의 뜻을 얻었다는 기도터는 찾기 쉽지 않다.
성수산 자락은 바람에 깎인 바위와 거친 능선의 자연이 그 품 안에 자리한 상이암의 절제된 처마선과 고요한 마당 분위기가 대조되었다. 처마 아래 펼쳐진 화려한 단청은 왕의 염원을 받들 듯 빛나고 있었다. 웅장한 산세를 마주한 정제된 사찰에서 진실한 기도는 더욱 깊어질 듯하였다.
왕의 기도처라 불리는 상이암의 화려한 단청 아래에서도, 이 산은 여전히 울림이 다른 기도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 상이암 아래 골짜기에는 이름 없이 신앙을 지키던 천주교 신자들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성수산 상이암에서 2km 아래 계곡에 성수산 왕의 숲 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휴양림에서 다시 2km 내려오면 임실 성수면 성수리 수철마을에 성수공소가 있다.
▲ 성수산 임실 성수면 성수리 천주교 성수공소
ⓒ 이완우
강물처럼 흘러가는 이야기
성수산의 역사 문화를 찾아보는 답사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성수공소는 마을 모정 뒤편에 정갈하게 단장 되어 있었다. 천주교 공소가 있는 마을을 둘러보다가 '자봉귀소(雌鳳歸巢)'라는 글귀를 발견하였다. 기자는 '암컷 봉황새가 둥지로 돌아온다'는 의미를 천주교 박해 시기를 이겨낸 신앙공동체의 당당한 선언으로 해석해 보았다.
임실의 강명자 문화관광해설사는 오랫동안 임실문화원의 지역 역사 문화 조사와 자료집 편집에 참여하였다. 강 해설사가 밝힌 천주교 박해 시기의 임실 성수산 신앙 공동체의 역사 문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현재 왕의 숲 생태관광지로 바뀌어 있는 성수산 계곡의 새터에는 10여 가구가 살았다. 새터는 성수산 휴양림의 산림휴양관과 오토 캠핑장 사이에 있는 공터이다. 이곳에 새터공소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중에 공소 건물이 불타면서 현재의 수철마을로 공소가 이전했다(출처 : <성수의 역사문화> 2012. 임실문화원). 이곳 새터 지역의 옛이름은 사근이(사근리 寺近里)였다. 상이암(절)이 가깝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임실 성수산의 갈골, 사근리 도장골, 뒷골과 왕방리 불당골(북당골) 등 여러 골짜기마다 천주교 박해 시기에 천주교인들이 은거하여 생활하였다. 왕방리 불당골에 터 잡은 안(安)씨 집안은 대대로 신앙을 지켜온 천주교인 가문이었다. 성수산의 여러 골짜기에 은거한 천주교인들은 그릇을 구워서 보부상처럼 팔면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그릇을 만들 때 아래 바탕에 십자가를 살짝 그려 넣었다고 한다."
현재 성수산의 등산은 성수산 휴양림에서 상이암을 거쳐 정상에 오르고, 다시 휴양림으로 내려오는 원점 회귀에 머물러 있다. 성수산 능선을 넘었던 잊힌 지장재나 보현재가 정비되어 등산로로 열리길 바란다. 임실 성수산 상이암에서 진안 섬진강 상류 신암리나 반송리로 성수산을 종주하는 등산로는 성수산을 왕의 설화가 지배하는 시선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태조 이성계 설화, 고려 신하 최양의 충절, 천주교 박해기에 신자들이 넘던 고갯길은 서로 분절된 이야기가 아니라, 성수산이 지녀온 여러 층의 역사와 문화는 통합되어 강물처럼 흘러가는 이야기로 전승되어야 한다.
▲ 임실 성수면 성수리 천주교 성수공소기 있는 자봉귀소형 수천리마을
ⓒ 이완우
▲ 진안 백운면 들녘의 성수산 전경, 성수산 능선을 넘는 보현재 잊힌 고개 안부가 보인다.
ⓒ 이완우
겨울의 끝자락과 봄의 문턱이 겹치는 입춘 절기를 하루 앞둔 지난 3일, 섬진 손오공릴게임 강 상류에서 흐르는 새 기운을 가늠해 보기 위해 전북 진안과 임실의 경계에 있는 성수산 역사 문화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섬진강 상류 진안 백운면 반송리의 두원마을을 찾았다. 진안 백운면 천상데미의 데미샘에서 샘솟아 흐르는 섬진강 상류의 작은 개울이 성수산(876m)의 동북쪽 약 7km에 걸친 산자락을 끼고 백운면 신암리 게임몰 와 반송리를 흐른다. 성수산의 산줄기는 임실 성수면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산자락은 진안 백운면 반송리와 신암리 쪽으로 깊숙이 이어지며, 사람과 사상이 오간 고갯길들을 통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 왔다.
여러 시대가 겹친 산
성수산은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의 설화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인정하 카카오야마토 지 않는 고려 말 충신 최양의 유신적 충절이 공존한다. 그리고 조선 말기의 천주교 박해와 신앙 공동체의 은거 흔적까지 안고 있는 성수산은 여러 시대의 진실과 긴장이 겹쳐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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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충신 최양 유허비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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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안 백운면 반송리의 소나무(반송). 마을의 상징
ⓒ 이완우
백운면 반송리 섬진강 개울둑에 고려 말 유신 최양 선생 유허비가 서 있다. 눈 덮인 고요 속에 선 만육 최양 유허비는 고려 유신의 담담한 충절을 품고 있고, 가지가 너르게 펼쳐진 반송은 마을을 감싸 안는 오래된 따스함과 품위를 전하고 있었다.
만육 최양(晩六 崔瀁, 1351~1424)은 정몽주(1338~1392)의 조카이다. 향토 자료는 이성계(1335~1408)의 남원 운봉 황산대첩 전투에 정몽주와 함께 종사관으로 참여하였다고 전한다. 최양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는 뜻을 달리하여 이곳 진안 백운면 신암리 중대산(장수 팔공산, 1151m) 돈적소에서 3년간 은둔하였다(관련 기사 : 기찻길 없는 섬진강 상류에 열차 정거장이라니).
▲ 진안 백운면 반송리 천주교 두원공소와 원종수 두원공소 회장 내외분
ⓒ 이완우
▲ 진안 백운면 반송리 천주교 두원공소
ⓒ 이완우
반송리의 천주교 두원공소(진안군 향토문화유산) 건물을 관리하고 있는 원종수 공소 회장을 만났다. 원종수 회장이 두원공소의 역사를 간략히 이야기해 주었다.
"박해 시기 깊숙한 골짜기인 신암리에 여러 골짜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서 살았지요. 고중대에 몇 분이 기도 장소를 마련하여 함께 하다가, 1957년에 이곳에 내려와서 공소 터를 잡았어요. 예전에는 공소에 신자가 상당히 많았지요. 지금이야 공소가 유적지 문화유산으로 남아있고, 지금은 진안 성당으로 다니지요. 이곳 두원마을에서 주암동 골짜기로 들어서서 능선 넘으면 상이암이에요. 신암리에서 지장재를 넘어서 상이암으로 가는 고갯길이 큰길이었지요. 옛날에는 이웃집 다니듯 다녔지요. 지금은 고갯길이 다 묵어서 다닐 수 없어요."
▲ 진안 백운면 신암리 대전마을, 천주교 신자 은거지
ⓒ 이완우
▲ 진안 백운면 신암리 대전마을, 천주교 신자 은거지
ⓒ 이완우
진안 백운면 신암리 대전마을과 임신마을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반송리 두원마을에서 2km, 다시 3km를 더 올라가야 했다.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산촌으로 숨어들어 신념을 지킨 산속 삶 터를 기억하는 공간이었다. 주위 산의 풍경과 척박한 환경에 신앙을 지킨 이들의 삶의 모습과 자연의 대비가 숙연하였다.
진안군의 향토문화백과사전에 의하면 팔공산의 고중대(古中垈)에는 이 산에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체 기도 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고중대(古中垈)는 고정대(古井垈)로 '옛날부터 우물 터'라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로부터 장수에서는 금남호남정맥의 마루금의 으뜸을 팔공산(八公山)이라고 하였고, 진안에서는 중대산(中垈山)이라 하였다. 기자는 중대산(中垈山)의 어원을 민간어원설이나 구전 지명으로 정대산(井垈山)일 가능성을 추정해 보았다. 팔공산(중대산)과 연결된 산맥의 마루금은 금강과 섬진강이라는 두 강의 분수령이다. '가운데 있는 터'보다는 '샘이 있는 터'라는 의미가 지형적 특징을 훨씬 잘 나타낸다.
▲ 진안 백운면 신암리 임신마을, 천주교 신자 은거지. 진안 데미샘 방향
ⓒ 이완우
▲ 진안 백운면 신암리 임신마을, 천주교 신자 은거지. 성수산 지장재 방향
ⓒ 이완우
섬진강의 맑은 근원
섬진강의 발원지를 데미샘으로 지정한 역사는 길지 않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택리지>는 섬진강 발원지를 팔공산(중대산) 또는 마이산으로 보았다. 1983년에 이형석(하천 연구가)이 데미샘을 섬진강의 발원지로 계측하였고, 국립지리원은 이곳 데미샘을 섬진강의 최장발원지로 인증했다.
데미샘은 섬진강 500리 물길의 시작점이다. 섬진강의 맑은 근원 데미샘이 있는 진안 백운면에 성스러운 기도터인 성수산이 있다. 이성계 희망의 기도터인 상이암, 망해가는 조국(고려)를 향한 충신의 비탄과 충절의 기도터인 최양의 돈적소, 신앙을 지키며 영원한 삶을 갈구했던 기도가 메아리치던 천주교 신자들의 산골짜기 여러 기도터. 좋은 샘(데미샘)이 있는 곳에 좋은 기도터(성수산)가 어울린다.
대전마을과 임신마을을 뒤로하고, 진안 백운면 들녘으로 내려왔다. 섬진강 강변 둔치에서 성수산이 가까이 보였다. 임진로 지방도로를 경유하여 성수산 상이암까지 거의 360도를 가깝게 돌아서 가야 했다. 16km를 자동차로 성수산 기슭을 멀리 우회하여 상이암에 도착하였다.
성수산 북쪽의 진안 반송리나 신암리에서 성수산 남쪽의 상이암이나 휴양림으로 오고가는 2~3km의 지장재와 보현재의 잊힌 고갯길이 정비되어 다시 열리기를 희망해 본다. 이들 고갯길은 성수산 상이암과 섬진강 상류 데미샘이 연결되는 새로운 관광 코스가 될 듯하다. 역사와 설화가 고갯길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 성수산 상이암
ⓒ 이완우
▲ 성수산 상이암 무량수전의 단청, 기동의 염원으로 보인다.
ⓒ 이완우
성수산 상이암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구룡쟁주(九龍爭珠)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건과 이성계의 두 왕조 창업 군주가 한 곳에서 하늘의 뜻을 얻었다는 기도터는 찾기 쉽지 않다.
성수산 자락은 바람에 깎인 바위와 거친 능선의 자연이 그 품 안에 자리한 상이암의 절제된 처마선과 고요한 마당 분위기가 대조되었다. 처마 아래 펼쳐진 화려한 단청은 왕의 염원을 받들 듯 빛나고 있었다. 웅장한 산세를 마주한 정제된 사찰에서 진실한 기도는 더욱 깊어질 듯하였다.
왕의 기도처라 불리는 상이암의 화려한 단청 아래에서도, 이 산은 여전히 울림이 다른 기도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 상이암 아래 골짜기에는 이름 없이 신앙을 지키던 천주교 신자들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성수산 상이암에서 2km 아래 계곡에 성수산 왕의 숲 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휴양림에서 다시 2km 내려오면 임실 성수면 성수리 수철마을에 성수공소가 있다.
▲ 성수산 임실 성수면 성수리 천주교 성수공소
ⓒ 이완우
강물처럼 흘러가는 이야기
성수산의 역사 문화를 찾아보는 답사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성수공소는 마을 모정 뒤편에 정갈하게 단장 되어 있었다. 천주교 공소가 있는 마을을 둘러보다가 '자봉귀소(雌鳳歸巢)'라는 글귀를 발견하였다. 기자는 '암컷 봉황새가 둥지로 돌아온다'는 의미를 천주교 박해 시기를 이겨낸 신앙공동체의 당당한 선언으로 해석해 보았다.
임실의 강명자 문화관광해설사는 오랫동안 임실문화원의 지역 역사 문화 조사와 자료집 편집에 참여하였다. 강 해설사가 밝힌 천주교 박해 시기의 임실 성수산 신앙 공동체의 역사 문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현재 왕의 숲 생태관광지로 바뀌어 있는 성수산 계곡의 새터에는 10여 가구가 살았다. 새터는 성수산 휴양림의 산림휴양관과 오토 캠핑장 사이에 있는 공터이다. 이곳에 새터공소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중에 공소 건물이 불타면서 현재의 수철마을로 공소가 이전했다(출처 : <성수의 역사문화> 2012. 임실문화원). 이곳 새터 지역의 옛이름은 사근이(사근리 寺近里)였다. 상이암(절)이 가깝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임실 성수산의 갈골, 사근리 도장골, 뒷골과 왕방리 불당골(북당골) 등 여러 골짜기마다 천주교 박해 시기에 천주교인들이 은거하여 생활하였다. 왕방리 불당골에 터 잡은 안(安)씨 집안은 대대로 신앙을 지켜온 천주교인 가문이었다. 성수산의 여러 골짜기에 은거한 천주교인들은 그릇을 구워서 보부상처럼 팔면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그릇을 만들 때 아래 바탕에 십자가를 살짝 그려 넣었다고 한다."
현재 성수산의 등산은 성수산 휴양림에서 상이암을 거쳐 정상에 오르고, 다시 휴양림으로 내려오는 원점 회귀에 머물러 있다. 성수산 능선을 넘었던 잊힌 지장재나 보현재가 정비되어 등산로로 열리길 바란다. 임실 성수산 상이암에서 진안 섬진강 상류 신암리나 반송리로 성수산을 종주하는 등산로는 성수산을 왕의 설화가 지배하는 시선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태조 이성계 설화, 고려 신하 최양의 충절, 천주교 박해기에 신자들이 넘던 고갯길은 서로 분절된 이야기가 아니라, 성수산이 지녀온 여러 층의 역사와 문화는 통합되어 강물처럼 흘러가는 이야기로 전승되어야 한다.
▲ 임실 성수면 성수리 천주교 성수공소기 있는 자봉귀소형 수천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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